일본서기 제 19권 흠명천황 23년 (562년) 8월 기사 인용사료모음

 일본서기 제 19권 흠명천황 23년 (562년) 8월 기사 
 

◆8월 천황이 대장군 大伴連狹手彦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狹手彦은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狹手彦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七織帳,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
[옛 책에 “鐵屋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七織帳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2벌,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五色幡 2竿,
미녀 媛[媛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吾田子를 蘇我稻目宿녜 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輕의 曲殿에 살게 했다.
[鐵屋은 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원문>
◆八月。天皇遣大將軍大伴連狹手彦。領兵數萬伐于高麗。狹手彦乃用百濟計。打破高麗。
其王踰墻而逃。狹手彦遂乘勝以入宮。盡得珍寶■賂。七織帳。鐵屋還來。
〈舊本云。鐵屋在高麗西高樓上。織帳張於高麗王內寢。〉以七織帳奉獻於天皇。以甲二領。
金■刀二口。銅鏤鍾三口。五色幡二竿。美女媛〈媛名也。〉幷其從女吾田子。
送於蘇我稻目宿?大臣。於是。大臣遂納二女以爲妻居輕曲殿。〈鐵屋在長安寺。
是寺不知在何國。一本云。十一年大伴狹手彦連共百濟國?却高麗王陽香於比津留都


나제동맹 파기는 배신의 달인인가? 선견지명의 달인인가? 역사관련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433년(고구려 장수왕 21, 신라 눌지왕 17, 백제 비유왕 7)에 우호관계를 맺으며 나제동맹을 맺었다.
이후 진흥왕의 나제동맹 파기로 인해 신라와 백제는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처절한 피의 전쟁사로 돌입하게 된다.
120년간 이어온 나제동맹이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깨어지게 된 사유와 그 배경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우선 일본서기 제 19권 흠명천황 23년 (562년) 8월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클릭
 

◆8월 천황이 대장군 大伴連狹手彦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狹手彦은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狹手彦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七織帳,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
[옛 책에 “鐵屋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七織帳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2벌,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五色幡 2竿,
미녀 媛[媛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吾田子를 蘇我稻目宿녜 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輕의 曲殿에 살게 했다.
[鐵屋은 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의 기사와 일본서기와 연관을 지어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눈에 뜨인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양원왕)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이 기사 내용에서  흠명천왕 11년은 5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경오년(庚午年; 550) 신라 진흥왕 11년, 고구려 양원왕 6년, 백제 성왕 28년이 되는 해인데
문제는 550년 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이듬해인 진흥왕 12년, 고구려 양원왕 7년, 백제 성왕 29년이 되는 551년의
사건내용 이다.
 

<백제 본기>
성왕28년(550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성왕29년 기사는 누락됨

<고구려 본기>
양원왕 6년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3월,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북제가 왕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양원왕 7년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 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 본기>
진흥왕 11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위의 550년 사건의 기사들로 보아 본질적으로 나제동맹 자체가 공고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 남.)

진흥왕 12년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백제본기에서는 모두 3월까지만 나타나고 이후는 모두 누락되어 있다.


다만 고구려 본기에서는 양원왕 6년 가을 9월,
 북제가 왕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라는 기사
이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칠부의 열전에 이런 기사가 있다.

진흥왕 12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

따라서 일본서기의
어떤 책에는 “11년(흠명천왕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라는 기사는 12년으로 수정되어야 하며 일본서기의 년대 삽입 오류인듯 하다.
따라서 흠명천황 12년 즉 551년 시기의 사건에 해당된다.
 

551년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공격으로 북쪽 신성으로 지원군이 이동되는 것을 틈타
백제와 왜국 그리고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 당하자 양원왕은 탈출을 하고  백제 성왕은 이 기회를
틈타 계속 진격하여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했으나  신라 진흥왕은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 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
하면서 고구려와의 전면전에 부담을 느낀 신라 진흥왕은 백제의 진격요청을 거절하게 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신라에 한강유역을 양보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고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격이 되어 버린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면서 이후 554년 관산성 침공을 하게된 발단이 되어 버린 사건이다.
 

일본서기 권 19  欽明天皇편에 다음 기사가 흥미롭다.
13년(552) 5월 戊辰 초하루 乙亥  百濟‧加羅‧安羅가 中部 德率 木리今敦‧河內部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가 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라고 백제 성왕은 왜국 흠명천황에게 청병을 한다.


그렇다면 552년 5월 이전에 이미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왜국에
청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에 소개된 흠명천황 13년(552) 마지막 기사가 눈에 뜨인다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十三年(五五二)
是歲。百濟棄漢城與平壤。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地名未詳。〉
일본서기(권19 欽明天皇)13년(552)
*이 해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尼彌方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계유년(癸酉年; 553) 신라 진흥왕 14년
○가을 7월 신라에서 백제의 동북 변방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 김무력(金武力)으로써
군주(軍主)를 삼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553년 신라가 백제의 동북부를 빼앗고 신주를 설치한 이후 부터 나제동맹이
파기된 것으로 보고있다. 바로 3달 후 백제 성왕의 딸과 진흥왕이 혼인을 했기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계유년(癸酉年; 553) 신라 진흥왕 14년
○겨울 10월 신라왕이 백제의 왕녀(王女)를 취하여 소비(小妃)로 삼았다.

 
그러나 위의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551년 백제, 신라,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한강유역을 대부분
차지한 이후 계속 진격할려고 한 백제 성왕과 이를 만류하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파기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552년에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리자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라고 한다
백제 성왕은 왜 그토록 힘들게 빼앗은 한성과 평양성을 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을 뒷 받침하는 내용이 바로 위에 소개된 일본서기 흠명천황 13년(552년) 5월 기사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할 계획으로 왜의 흠명천황에게 청병을 하는 가운데 한성과 임나(가야)를 저울질 하는게 눈에 뜨인다
따라서 성왕은 신라와 고구려를 함께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기 때문에 한성과 평양성을 버린게 아닌가 싶다.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왜군과 가야군을 끌여들여 연합군을 결성한 것으로써 한성과 평양성을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남부 가야지역에 공을 들이면서 왜군을 끌여들여 1차적으로 신라를 토벌하고 한성과 평양성을 수복할려는
전략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위의 본문에서 나열된 일련의 기사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나름대로 재구성해 보면

550년에 고구려의 도살성을 백제가 빼앗았고 백제의 금현성을 고구려가 빼앗았던 것을 신라가
이들 2성(도살성,금현성)을 가로 채어 빼앗은뒤 증축하여 꿀꺽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이든 고구려이든 신라에게 별다른 반응이 없고 특히 백제와 신라는 계속 동맹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551년 고구려의 양원왕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북쪽 변경에서는 돌궐이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고
있었던 시기로 게다가 남쪽 변경에서는 백제-왜-신라 연합군의 파죽지세 공세로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하고 평양성(남평양성=한수이북으로 추측)마져 함락 당하는등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견제하면서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하게 됨에 따라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포기하고 신라에 넘겨주는 형태가 되었다. 
아울러 백제는 한성과 평양성의 기세를 몰아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고구려와의 전면전에 부담을 느낀
신라 진흥왕의 거절로 인해 좌절되어 왜국과 임나(가야)국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552년 5월에 백제 성왕이 왜국의 흠명천황에게 신라를 치기위한 군사를 요청하고 있다.
그 내용은
흠명천황 13년(552) 5월 戊辰 초하루 乙亥  百濟‧加羅‧安羅가 中部 德率 木리今敦‧河內部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가 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의 양국에 부담을 느낀 성왕은 결국 한성과 평양성을 포기해 버린다
이후 554년 7월까지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기록이 보이지 않아 백제 스스로가 한주지역을 포기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해(552년)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尼彌方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553년 7월에 백제가 포기해 버린 한주지역을 신라가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軍主)로 삼아
         자국의 영토로 편입을 하게 된다.
         겨울 10월 백제본기에서는 왕의 딸을 시집 보냈다고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의 기록은 의외로 백제의 왕녀(王女)를 취하여 소비(小妃)로 삼았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에 대해 이미 경계를 하고 성왕에게 수모를 주는 태도를 취한다
 

 
554년 5월 왜국의 군사를 내어 6월에 백제에 도착,
7월 부터 백제-왜-가야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시작
9월에 백제 성왕은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감으로써 서전을 장식한다.

10월에는 신라가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로 사료되며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로 백제 웅천성을 공격
     하였으나 백제는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는 패한채 퇴군하고 말았다.

  
그러자 백제는 이를 잘 수습한 뒤에 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12월 9일에 신라의 각간 우덕, 탐지등을 물리치고
관산성을 함락시킨다. 다급해진 신라는 급기야 신주의 김무력 부대까지 합류시켜 전투를 치루게 한다.
신주의 김무력 부대가 합류한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가 이루어 진것은 확실해 보인다
 
554년 7월 부터 12월 까지 장기간 벌어진 백제의 승리에 힘입음과 동시에 이때 뛰어난 활약을 한 백제왕자 
부여창(=위덕왕)을 칭찬하고 오랜 전투의 노고를 위로 하기 위해 50명의 수뇌부를 이끌고 갔다가 김무력 부대의
첩보술에 의해 매복에 걸려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에게 사로잡혀 전사를 하게 됨에 따라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은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로써 120여년간의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이후의 백제와 신라와의 역사는 철전지 원수지간으로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진흥왕은 왜 나제동맹을 파기했어야 했나??
 
결론적으로 위의 본문에 나타나듯이 신라는 지형적으로 한반도 동남쪽 끝부분 궁벽진 곳에 위치하여 자체적으로는
중국의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불가능하며 바닷길로써는 너무 멀다.
법흥왕 이전의 신라는 그야말로 삼국중 가장 후진성을 면치 못할 정도로 문화적으로나 국력적으로나
가장 뒤처져진 국가였다.
 
그러나 법흥왕대 불교가 유입되고 고구려-백제에 의탁하여 사신을 파견하고 대륙의 중국을 접한 이후 신라는
다른세계의 문명에 놀랄수 밖에 없었고 이는 곧 대륙과의 교류만이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닳게 된다.
 
그래서 신라가 가장 필요로 햇던 것은 중국과의 연결되는 통로 확보이다. 바로 한강유역과 경기만 일대이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쟁탈지역으로 백제 영역에서 광개토왕 이후 장수왕대에는 완전히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된 상태였다.
 
6세기 중반 백제 성왕때에 이르러 백제는 신라와 왜의 동맹군으로 한강유역을 완전히 되찾게 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된다 계속 고구려를 멸망시킬때 까지 진격하자는 백제 성왕측과 더 이상의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원치 않으면서 또한 백제가 비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던 신라 진흥왕의 입창차이에서 동상이몽의
두국가가 서로 동맹관계를 영원히 지속해 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실상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에 의해 맺어진 국가간의 동맹은 언제나 항상 깨어지게 되는 법이다.
적국의 적이 바로 나의 아군이 되는 철저하게 자국의 필요와 이익에 따르게 되는 동맹이 영원하라는 법이 없다.
어느쪽에서 누가 깨든 반드시 깨어지는게 오히려 당연한 이치이다.
 
만일에 백제 성왕이 한수지역을 확보하고 평양성을 격파 함락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고구려까지 도모한다면
그야말로 거대해진 백제와 상대적으로 빈약한 신라! 게다가 서해를 나갈 수 없는 꽉 막힌 초라한 신라의 지형!
상대적으로 백제는 서해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다 보면 백제와 신라간의 국력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결국에는 국력차이를 극복 못한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 되거나 백제에게 멸망 당하는 외길 수순이 명백할 뿐!
진흥왕이나 신라조정에서는 바로 이러한 심각한 미래의 문제점을 결코 간과 할 수가 없는 입장인 것이다.

진흥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백제가 현저하게 비대해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평양성 격파후 신라는 더 이상의 백제 진격을 가로 막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으면서 고구려가 지배
했던 한수지역의 지배권을 인정 받으면서 챙기고 아울러 백제를 압박하여 스스로 포기한 한주지역을 별다른
전투없이 무혈입성하여 드디어 중국과의 통로를 확보하고 개척하게된다.

또한 552년에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스스로 버린 상황이라면 적어도 진흥왕이 뒷통수를 먼저 쳤다는 일반적
통설은 성립되질 않는다.
.
하지만 누가 뒷통수를 쳤던 서로간 신뢰와 맹세로써 영원한 동맹을 기약하며 맺어진 동맹이 아니라면 전쟁사에서
뒷통수를 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당한 사람이 무능한 것으로 병법서들은 평가하고 있다. 
어차피 전쟁에서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승리가 미덕일뿐, 패배자에게는 어떠한 변명이나 동정심도 보이질 않는다. 
손자병법에서는 "兵者 詭道也 : 전쟁은 속임수"라는 명 구절을 남기고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고간 도도의 성왕 참수 장면에서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오히려 성왕에게
동맹의 맹세를 어겼다고 나온다
신라입장에서는 더 이상 우리가 전쟁을 하기 싫어서 더이상의 고구려 진격을 거절한 것이지 동맹을 깬 것이
아닌데 왜놈들과 내통하여 전쟁을 일으켜서 침공한 자체가 뒷통수를 친 원수가 되고 동맹을 깨는 배신 행위로
간주하여 맹세를 성왕이 어겼으니 왕이라도 참수를 당해야 한다는 논리이고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 성왕의 입장에서는 내친김에 아예 고구려를 결단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도중에 딴지걸고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배신하고 게다가 딸까지 시집보낸 공주를 겨우 小妃 로 만들어 능멸한 것에 대한
분노로써 "생각하면 늘 고통이 골 수에 사무친다"는 상반된 입장이 보여진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이로써 신라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빠르게 유입하고 또는 교류하면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되는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아울러 진흥왕은 신라의 중흥을 이루는데 크게 업적을 남긴 군주로써 선경지명의 군왕으로 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 종전 내용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큰 차이가 없으나 약간의 보충과 더불어 수정되었으며 계속 수정보완
될수도 있습니다.
<본 내용은 2013 년 3월 1일자로 내용이 1차 수정 보완 되었습니다.>


554년 관산성 전투 재고찰 역사관련

554년 관산성 전투 재고찰
 

이 사건은 기전체인 삼국사기의 기록이 너무 소략하여 삼국사기의 내용만으로는
매우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 된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554년(백제 성왕 32년, 신라 진흥왕 15년, 고구려 양원왕 10년)
7월에 관산성 전투가 발생되어 성왕이 전사하고 장병 2만9천6백명이 참살 당했다는 기록이다.
     클릭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554년) 기사 참조
 

그리고9월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의 죽음으로 대패한 초상집에서 기적같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필을 약탈해 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클릭 --->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편 기사 참조
 

이 내용으로는 국왕이 전사한 패전의 심각한 휴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초상집에서 대규모의 군사동원하여 복수전을 펼친 것으로 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납득조차 하기 힘든 내용이다.

더욱 납득하기 힘든 것은 고구려의 행동이다.

고구려는 10월달에 대규모의 군사를 내어 백제 수도 근방인 웅천성을 공격한다.
     클릭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위덕왕 원년 (554년) 기사 참조
     클릭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10년 (554년) 기사 참조 
 

아무리 웬수같은 적국이지만 비록 弔問(조문)사신을 보내지는 못할 망정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초상집을 침략하는 경우는 명분을 중요시 했던
고대의 전쟁 생리상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며
신라의 영토를 뛰어 넘어 백제 수도까지 쳐들어 갔다는 것은 더욱더 납득하기 힘들다.
 
백제가 잘 방어하여 고구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사실이라면 국왕및 좌평4인의 국가 수뇌부의 초상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한 백제의 괴력에 혀를 내 두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로소 납득이 된다.
 
554년 5월에 군사를 내어 6월에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사와 더불어
12월 9일에 신라를 공격, 函山城(관산성으로 추정)을 공격, 함락 시켰다는 내용과
이를 알리기 위해 왜국의 흠명천황에게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으므로
     클릭 --->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554년) 기사 참조
 

적어도 백제 성왕은 554년 겨울 12월 9일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위의 불가사이한 전투 기록사가 최소한 납득할 만해진다.

이를 다시 재구성해 보면 그 전말은 이러한 내용이 된다.

일본의 왜군이 5월에 군사를 징집하여 6월에 백제에 도착하였으며
왜군과 가야병이 집결되자 백제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7월 부터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9월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백제왕자 여창의 활약이 눈부시다.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필을 약탈할 정도로
백제는 서전을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린다.

이에 신라에서는 각간 우덕과 탐지등으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도록 하였으나
백제의 강한 공격력으로 신라는 苦戰을 계속한다.

이에 신라는 평양성 함락시 고구려를 아예 멸망시킬때까지 끝장을 내자는
백제 성왕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이를 무산시켜 준 댓가로써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한다.
 
고구려 역시 백제의 성왕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위해 신라가 길을 열어 준 영토(한수 지역)를
가로 질러 아예 백제수도인 웅천지역으로 진격 웅천성을 공격한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이미 신라와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기세로 사기가 충천한 상태에서 
자신의 영토에 깊숙히 들어 온 고구려군과 잘 싸워 이를 물리 치게 된다.
 
고구려군과 전투를 하는 동안 백제의 공세가 주춤하는 사이
신라는 한숨을 돌리며 전투력을 재정비한다.
고구려군은 백제영토 깊숙한 곳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퇴각해 버린다.
 

이를 관망하던 신주의김무력부대는 고구려군이 퇴각을 함에 따라  급기야는 관산성 전투에 나서게 된다.
 

고구려군을 물리친 백제는 사기충천(士氣衝天)하여 다시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시키게 된다.
 

거의 7월부터 겨울 12월까지 장기간 치뤄지는 전투에서 승리를 한
왕자 부여 창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좌평4인과 50명의 근위병만 대동한채 관산성으로 향하는데
가야출신 김무력 부대의 첩보망에 의해 노출된 백제 성왕의 행군로를 파악한 후에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를 성왕의 행군로 길목에 매복시켜 성왕을 사로 잡아 살해해 버린다.
      (대략 연합군중 가야인의 첩자를 이용한 것으로 추측)
 

이것을 빌미로 승승장구하던 백제군은 국왕의 전사에 패닉(Panic)상태가 되고
반면에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단숨에 전세는 역전되고
왕을 비롯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 당하는등 대패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관산성 전투의 전말이 아닌가? 한다
    

그래야만 9월에 삼국유사에서
소개된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는 기사가 성립되고

10월에 고구려가 신라영토를 가로질러
 백제 수도지역 웅천성까지 진격해 전투를 벌였던 내용이 성립 된다.
 
적어도 12월 9일 까지는 일본 서기에 의해
백제 성왕은 전사하지 않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일본서기,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킬려고 했던 백제 성왕의 요구를 무시하고 나제동맹을 파기하여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고구려의 회복을 도와 줌에 따라  
광개토대왕시기에 구원받았던 빚을 나제동맹 파기로 제대로 갚아준 셈이 된다.
그리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얻어 중국과의 교역로를 확보하여 중국과 활발한 교역으로
신 문물등의 유입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삼국의 최후 승자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진흥왕의 배신으로 볼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가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면 백제의 국력은 그야말로 엄청난 대국이 되는데  
이웃 백제의 국력이 거대해 지면 상대적으로 신라는 백제의 지배력에 들거나 속국화 또는 멸망의 수순을 밟는게
당연지사 진흥왕이 그런 수순을 모를리가 있겠는가? 
약체인 신라는 고구려-백제가 서로 견제하고 그사이 자신은 국력을 키워나가고 실리를 취하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돌궐의 침략으로 북쪽조차 정리를 못한 마당에 백제 왜국 신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
당하는 등
최대의 위기에서 신라가 오히려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에 접근하여 밀약을 맺어줌으로써
고구려는 한수지역을 포기하고 신라에 내어주는 것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되어 국력회복의 기회를 얻게된다
반면 백제는 신라의 배신감에 왜국과 가야를 끌여 들여 신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관산성에서 국왕인
성왕이 전사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이후의 신라-백제간의 역사는 피 터지는 난타전 보복 전쟁의 역사로 돌입하게 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흠명천황 15년(554년), 16년(555년) 인용사료모음

일본서기에 의하면 흠명천황 15년(554년), 16년(555년) 

여름 5월 丙戌 초하루 戊子  內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百濟에 나아갔다.

겨울 12월   百濟가 下部의 杆率 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百濟王 臣 明과 安羅에 있는 倭臣들,
任那 여러 나라의 旱岐들은 아룁니다.
斯羅가 無道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구려와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官家)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有至臣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東方의 領인 物部 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山城(=관산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竹斯 物部 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新羅뿐이라면 有至臣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후략>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十五年(五五四)五月戊子《三》
◆夏五月丙戌朔戊子。內臣率舟師詣于百濟。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十五年(五五四)十二月

◆冬十二月。百濟遣下部杆率■斯干奴上表曰。百濟王臣明及在安羅諸倭臣等。任那諸國旱岐等奏。
以斯羅無道。不畏天皇與狛同心欲殘滅海北彌移居。臣等共議遣有至臣等仰乞軍士。征伐斯羅。
而天皇遣有至臣帥軍以六月至來。臣等深用歡喜。

以十二月九日遣攻斯羅。臣先遣東方領物部莫哥武連。領其方軍士攻函山城。
有至臣所將來民竹斯物部莫奇委沙奇能射火箭。蒙天皇威靈。以月九日西時焚城拔之。故遣單使馳船奏聞。

 

別奏。若但斯羅者。有至臣所將軍士亦可足矣。今狛與斯羅。同心戮力。難可成功。
伏願速遣竹斯嶋上諸軍士。來助臣國。又助任那。則事可成。<후략>



이듬해인 흠명천황 16년 (555년)
봄 2월 백제 왕자 餘昌이 왕자 惠[왕자 惠는 威德王의 아우이다]를 보내어
"聖明王 이 賊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5년에 신라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천황이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十六年(五五五)二月
◆十六年春二月。百濟王子餘昌遣王子惠〈王子惠者。威德王之弟也。〉
奏曰。聖明王爲賊見殺。〈十五年爲新羅所殺。故今奏之。〉
天皇聞而傷恨。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10년 (554년)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10년 (554년)

10년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위덕왕 원년 (554년)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위덕왕 원년 (554년)

원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웅천성을 침공하였다가 패하고 돌아갔다.
 

○元年冬十月, <高句麗>大擧兵來攻<熊川城>, 敗衄而歸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편 (승성3년) 인용사료모음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편 (승성3년)

승성 3년(554년) 9월에 백제의 군사가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자고 하니
진흥왕이 말하 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 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이 되어서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을 한 것이다.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년)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년)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554년)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554년)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농>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찬<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이다? 역사관련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다."
이 말 한마디에 온갖 기존 역사서 기록을 무시하고 패자에 대한 동정론 아니면
기록이 미비하거나 중국기록에서 불리한 내용이거나 또는 삼국사기에서 불리한 내용일때
승자에 의한 조작된 왜곡이라고 단정하거나, 김부식이 신라계 후손이라서 조작 왜곡했다는등
오히려 전하는 기록의 정반대로 해석하면서 역으로 과장하거나 조작하여
특정인물이나 국가를 우상화시키는등
그 반대가 되는 별다른 하자가 없는 특정인물과 국가에 대해서는 악의적인 음모론으로 폄훼시키면서
마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격언을 들이대며 증명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들이대는 부류의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로마 속담을 제대로 파악하여
참으로 합리적인 논리로 잘 정리되어 있는 내용이 포스팅된 블로그가 있기에 너무나 공감되어 그 내용을
이곳에 소개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 ( http://dhistoire.egloos.com/2655525  )

출처 :  hyjoon의 硏省齋 :

난중일기와 성호사설을 인용하는 가짜 지역감정용 떡밥 역사관련

 

난중일기와 성호사설을 인용하는 가짜 지역감정용 떡밥  

아마 각종 블로그를 방문하면서 여러 수많은 글들을 보아 왔지만 참으로 감동적이다.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난무하는 음모론적 떡밥에 대해 정확한 사료의 근거로 올바르고
예리한 반론의 지적은 참으로 통쾌하고 공감적이다.
이런 글은 수백번 읽어도 빈틈이 거의 없는 완벽한 참으로 잘된 내용이다
이러한 참된 내용의 글을 여기에 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번동아제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 빨간글씨=떡밥의 글
★. 흑색, 청색글씨는 번동아재님의 글 

◆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 글들1)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 "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에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보전된다"(충무공 난중일기)2)
 
慶尙徒 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怯奸又諶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놈들은 무리를 지어 머리를 깎고 왜옷을 입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전라지방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왜적보다 더 심한 바가 있다.
노인 어린이 부녀자의 머리를 베어 왜의 장수에게 진상하기도 한다" (충무공 난중일기)3)
 
경상도인은 권세를 무한히 추종하고 아부하므로 능히 밑에 두고 부릴만하다....허나 일단 스스로 권세를 쥐면
무한히 그 힘을 휘둘러 무릇 뭍사람을 번민케 한다....
입으로는 올은말 만 하면서도 뒷전으로는 온갖 못된짓을 먼저 하며 입으로는 대의와 도리를 부르짖으며
뒷전으로는 스스로의 사사로운 이득과 안위 챙길 궁리를 하니 자못 가증스러운 데가 있다.....
성정이 포악하여 함부로 사람의 수족을 다침을 예사로 안다....소매를 나누어 헤어질때는
반드시 해악을 입히고 떠나가니 평소에 멀리함이 가한 무리라 할것이로다. (이익의 성호사설)

위 난중일기 운운하는 이야기는 새삼 따져 볼 필요도 없는 내용이다.
충무공 난중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구절을 그대로 믿은 사람이 있다면 난중일기를 보지 않은 사람이 틀림 없다.

 
물론 난중일기에 저런 구절이 나오는지 여부와 별개로 경상도 일부 해안지역에서 왜인으로 변장한 가왜나
부역자가 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가왜나 부역자는 점령지역 전체에서 나왔을 뿐 경상도만의 현상도 아니었다.
심지어 함경도에서는 반란자들이 조선의 왕자들까지 일본군에 넘겨준 사례가 있다.
이순신이 장계 등을 통해 이같은 부역자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긴하나 위 구절과 같은 뉘앙스의 글은 아니다.
경상도 장졸에 대한 비판의 경우 원균에 대한 비판을 하는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경상우수영 수군을 비판하는
시각이 드러날 때가 있을뿐 위 인용구 같은 구절도 없을 뿐더러 그것이 경상도 장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전무하다.
더구나 원균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경기도 지역이 고향이다.
 
이것 외에도 이순신이 죽었을 때 전라도 사람들은 통곡하고 경상도 사람들이 잔치를 벌였다 같은 더 황당한
이야기까지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이순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후원자들-시종일관 변함없는 후원자였던 서애 유성룡이나 신구차로 사형 직전의
이순신을 결사적으로 구명했던 약포 정탁 같은 인물들이 경상도 안동과 예천 태생임을 감안하면 이런 헛소리들도
전혀 근거가 없음은 물론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을 인용했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더욱 황당하다. 이익 역시 당파적으로 남인 출신이다.
이익이 비록 기호 남인이긴 하지만 기호 남인들도 기본적으로 영남 남인에 대해 우호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익이 저런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실제로는 성호사설에 위에서 인용한 내용과 비슷한 구절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반대되는 내용-경상도를 찬양하는
내용은 있다. 이익은 경상도는 세력있는 문벌에 영합하지 않는다고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진짜 내용 오직 영남은 군자의 남은 교화를 지켜,
어른을 섬기는 예절의 절하고 꿇고 나오고 물러가는 것을 감히 어기지 못하여,
친척이면 친척이 되는 그 의리를 잃지 않고 친구이면 친구가 되는 의리를 잃지 않아서,
대대로 전하는 예전 정의로 기쁘게 성의를 보이며,
다른 좌석에서 만나면 비록 일찍이 얼굴을 알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절하고 읍(揖)하기를 의식과 같이 하고,
다른 고을과 마을에 손으로 지날 때에 장로(長老)가 있는데도 찾아뵙지 않으면 비판을 받으니,
이것이 신라의 남은 풍속이다.지금에 있어 온 나라 가운데서 오륜이 구비한 시골을 찾자면 오직 이 한 지방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산천 풍기로 증험할 수 있다.대저 영남의 큰 물은 낙동강인데,
사방의 크고 작은 하천이 일제히 모여들어 물 한 점도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이 없다.
그 물이 이와 같으면 그 산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인심이 한데 뭉치어 부름이 있으면 반드시 화답하고,
일을 당하면 힘을 합하는 이치이다.
게다가 유현(儒賢)이 대대로 일어나 스스로 성교를 이루어서 고치고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의 즈음에도 오직 신라만이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여 1천 년을 전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인심이 흩어지지 않는까닭이 아니겠는가? 이것뿐 아니라 선비를 논할 때에도 관작과 지위로 하지 않고,
만일 한 고을의 물망이 아니면 비록 자신이 청자(靑紫)를 취하였더라도 수에 치지 않는다.
선현(先賢)을 대단히 좋아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퇴계 이황ㆍ남명 조식ㆍ서애 유성룡ㆍ한강 정구ㆍ우복 정경세ㆍ여헌 장현광 여러 선생의 문에 출입한 자는 그 후세 자손을 모두 우족(右族)으로 칭하고, 부조(父祖)의 관작이 없는 것은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비가 행검을 힘써서 입사한 뒤에는 백의(白衣)로 영(嶺)을 넘는 것을 욕되게 여기고,
시속 좋아하는 것에 영합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어,
우리나라에서 문벌을 숭상하는 풍습이 오직 이 한 지방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토풍(土風)으로 말하면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고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으며, 부녀는 반드시 밤에 길쌈하고
선비는 모두 짚신을 신으며, 혼인 상사에 집 형세의 있고 없는 것에 따르고,
붕우와 친척이 도와주어 전복하고 유리하는 환을 면하며,
백성은 모두 토착하여 농사를 짓고 교활한 도적이 일어나지 않으며,
국가에 일이 있으면 솔선으로 난에 임하여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으며,
만일 글을 읽고 도리를 말하여 그 행검과 재능이 밖으로 나타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옷깃을 여미고
스승으로 높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후한 풍속, 즐거운 땅, 인의(仁義)의 시골이다.
이것을 버리고 장차 어디에 의지하여 돌아갈 것인가?
무릇 조정 귀족으로써 탐욕하는 사람들은 이익으로 나왔다가 이익이 다하면 배반하기 때문에
신하는 모름지기 물러가고 겸양하는 사이에서 구하여야 한다.
공자가, “능히 예로 사양하면 나라를 다스림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하였으니,
오직 영남만이 이런 것이 있다 하겠다.
<성호사설 권13 인사문 영남오륜 >
 

구글이나 네이버 등으로 검색해 보면 날조된 내용으로
경상도를 폄하하는 글은 아주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상태다.
굳이 날조를 감행하면서까지 이런 글을 퍼트린 것으로 보아

이 같은 날조된 글의 최초 작성자는 분명한 악의와 고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항쟁만 봐도 전라도는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오늘 역사 밸리에는 전라도 운운하는 오래된 떡밥 하나가 올라 왔다.
이런 글 또한 진지하게 따져볼만한 이야기가 아님은 물론이다.
역사에서 긁어모은 이야기로 전라도를 비판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훈요십조에서 출발한다.
훈요십조의 위작설 등 온갖 학설이 난무하고 있지만 훈요십조가 실제로 존재했다해도 그 의미는 제한적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애당초 나주에 강한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나주와 그 주변 지역 출신 인물들은 혼맥으로도 고려 왕실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호족으로 고려 초기 조정에서도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훈요십조의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왕건이 말했다는 "역향" 운운하는 이야기가
오늘날 전라도 전역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가 없다.
다시 말해 고려 왕조에서 구 후백제 중심 지역에 대해 모종의 경계감을 가졌다 해도
그 지역은 주로 전주를 중심으로 한 좁은 지역이었을 뿐 오늘날 전라도 지역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전주 지역을 반역의 고장으로 보았던 역사속 논리가 현재 시점에서도 특정 지역의 인성 문제와
관련지어서 진지하게 생각할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일까. 당연히 그럴리 없다.
이를테면 성호 이익은 훈요십조를 사실로 믿으면서도
'고려시대에 반역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의심하던 전주가 결국 조선왕실의 뿌리가 됐다"는
독특한 해석을 하고 있다.

 
왕 태조가 그 말년에 친히 훈요 열 가지 조항을 만들었으니,
그 내용인즉 (중략) “차현(車峴)에서 남쪽 공주강(公州江) 밖의 산과 땅은 모두가 반역적인 형체이고
인심도 그러하니, 거기서부터 남쪽 지방의 인사들에게 벼슬을 주어 용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대개 고려 태조가 남긴 훈요는, 모두가 부처에 대한 일로서 도선의 협조와 찬성으로 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일의 잘하고 잘못함을 논하지는 않겠으나
지금 우리 성스러운 왕조의 기반이 사실 전주에서 시작되었으니, 도선의 말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그가 한갓 사람을 등용하여 용사하지 못하게 금할 것은 알았으나,
하늘의 뜻과 인심이 이미 남모르는 사이에 옮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도 짧음이 있고 치도 긴 것이 있다시피 술법도 때로는 통하지 않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여조 훈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려가 경계하던 전주지역에 가문의 뿌리를 둔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했으니
결국 훈요십조에서 반역을 걱정했던 것이 현실화됐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런 특정지역에 대한 차별관은 고려 왕조에나 적용될수 있는 논리"라는 이익의 해석법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에서도 이미 적용할 수 없는 이야기가 새삼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적용될리가 있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성호 이익은 고려 훈요십조의 "반역의 고향" 운운하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에서 결코 적용될 수 없는 고려왕조적인 가치 기준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현대에 와서 훈요십조의 구절을 "배신을 잘하는 지역성" 운운으로 거칠게 연결하는 것은
근거가 전혀 없는 이야기가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호남 민심 운운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그 또한 곧이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그런 평가를 하는 기초 자체가 유교적 인간관, 세계관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21세기의 한국인이 그런 유교적 인간관이나 그에 기반한 평가를 그대로 수용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실록에 나오는 전라도 인심에 대한 비판 구절 몇 개로 전라도를
폄하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거리인지 깊이 공감할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항쟁을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전라도 의병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기나긴 전쟁 동안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까지 진입해서 의병 항쟁을 벌였던 인물들은
대부분 전라도 의병들이었기 때문이다. 전라도 의병은 북으로는 황해도까지 동으로는 경상도 진주 일대까지
오가며 임진왜란 극복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구한말 대한제국이 국가 차원에선 전쟁 한번도 치러보지 못한 상태로 나라를 잃는 치욕을 당할 때 가장 격렬한
의병항쟁을 벌였던 지역 또한 바로 전라도다.
일본군 정규군은 전라도 지역 의병을 제압하기 위해 이른바 남선대토벌로 불리는 일련의 교전까지 치러야 했다.
솔직히 전쟁 한 번 없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다.
그런 치욕을 면하게 해준 대표적 지역이 바로 전라도다.
 
가치관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는 동학 문제나 현대 이후의 역사는 거론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의병과 구한말 전라도 의병 항쟁이라는 두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전라도 사람들이 그 지역의 역사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실록의 전라도 민심 운운하는 구절 몇 개는 그냥 웃어 넘겨도 무방할 정도로
무게감이 없는 이야기들이다.
 
■ 역사상 사대주의 문제를 특정 지역만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옳을까 반대로 경상도를 욕할 생각도 없다.
임란당시 가장 먼저 의병 투쟁을 시작, 격렬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왜군 정규군을 격퇴한 사례(고령)나
주요 도시를 수복(영천,경주)한 경상도 의병들의 고난에 찬 행적을 보면 오히려 경상도 의병들의 활약상은
곽재우 등 일부 신화적 인물의 전설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대주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우리 역사상 사대주의의 모든 문제점을 경상도로 연결시키려 하는 시도 또한
그리 진지한 접근법이 아니다.
명 태조의 과격한 대조선 외교에 분노를 느끼고 오랑캐 중에 중원에서 왕 노릇한 자가 많다며 요동정벌을 꿈꿨던
정도전이 바로 경상도 출신이다.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를 뒷받침했던 정인지는 경상도 출신인데 비해 한자의 우위를 거론하며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는 황해도 출신이다.
임란 당시 명나라의 횡포에 분노를 느끼며 징비록을 통해서 명나라 원군을 혹평했던 유성룡은 바로 경상도 출신이다.
이에 비해 재조번방지처럼 명나라에 대한 절대 충성을 다짐하며 임란 극복의 모든 공이 명나라의 힘이었다고
주장하는 재조번방지의 저자 신경은 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 서인 출신이다.
현실 역학적 문제를 고려한 실용적 사대주의가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이념적인 사대주의의 극한을 보여주는
송시열 또한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기호 지방 출신이었다.
이런 사례들은 사대주의 문제를 특정 지역 출신 인물들만의 문제로 연결시키려는 시각 자체가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친일파 문제에 있어서도 유독 경상도를 거론하는 것은 균형 감각을 상실한 비판이다.
을사오적, 정미7적, 경술국적 등 1905~1910년에 걸쳐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앞장섰던 주요 인물들의 고향은
대부분 경기도 일뿐 경상도 출신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 수에 있어서도 경상도는 결코 적지 않으며 3.1운동 참여자 수에 있어서도 도별 통계를 따져보면
경상도는 오히려 많은 편에 속한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도 전라도나 경상도를 거론하며 특정 지역 사람 전체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자해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인구통계를 보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친 인구는 전체 조선 인구의 1/2~3/5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거대한 인구 자원을 자랑하는 두 지역 중 하나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결국 한국인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현대 이후 한국 정치에서의 지역 문제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특정한 자기의 정치적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거 역사까지 난도질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 날조일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결국 우리나라를 좀 먹는 자해행위에 불과한 짓거리다.

위의 본문 출처 :  번동아제의 사랑방  <  http://lyuen.egloos.com/489421  >

 


대(代)와 세(世) 촌수(寸數) 관계표 일반상식관련


신채호의 역사연구-어떻게 봐야 하는가? 역사관련

그렇지 않아도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를 읽을때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단재선생의 주관적이며 또한 배타적인 민족적 성향과 독단적인 관념적 성격이 너무 강하여
그가 집필한 조선상고사는 실증적이며 보편적 내용조차도 오류가 많아 부정적인 생각으로
거의 불신한 상태에서 흥미조차 잃었었는데
 hyjoon의 硏省齋 블로그에 
아래의 트랙백된 내용이 그나마 명확하고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잘 정리된 내용으로
당시 상황에 처해진 단재선생의 의식과 사상이 반영된 그리고 주관적인 관념으로 집필된 
조선상고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과 공감을 가지는 내용이라 가져온 것입니다. 

내용 : 신채호의 역사연구-어떻게 봐야 하는가?  <===== 클릭

연개소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관련

연개소문 장군에 대해 여러 내용이 있었지만
가장 사료해석에 있어서 객관적이고 합리성이 돋보이는 매우 공감되는 내용이라
을파소의 역사이야기 의 블로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용 : " 연개소문을 어떻게 볼 것인가? " <====== 클릭

의자왕의 탁월한 전략? 역사관련


의자왕의 탁월한 전략?


역사추적 해당 프로그램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라면서
"의자왕의 탁월한 전략?" 이라는 아래의 내용으로 포스팅(적색 글자 부분)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이런 황당한 내용으로 포스팅 되었는지? 오히려 의아하다.
 
내용이 사료를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마음대로 들이대는 논리라 별로 가치성을 못느끼지만 
그냥 가볍게 반론하는 수준으로 포스팅을 해 볼까 한다.
 
나당연합군은 18만 대군, 그들은 대군답게 백제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육지와 바다의 양동작전도 성공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바로 보급이었다.
특히 군량문제가 심각했다.
===> 나당 연합군의 신라군 황산벌전투 와 소정군의 백강 전투 또는 웅진강 어귀 전투가 7월 10일
단 하루정도에 끝나고 (
정상적이라면 7월 9일은 전투가 일으나기 힘들며,  
7월 9일 막 도착하자마자  적진분석, 작전계획, 전투준비 및 진영도 채 갖추질 않고
행군으로 피곤한 군사들의 휴식도 없이 동네 깡패들 패싸움 하듯이 도그파이터를 했다면 몰라도...)

7월 11일 소정방군과 합세 그리고 사비성을 7월 12일날 사비성을 포위하기 위해 소부리벌로 진격한 것인데
뭔 군량문제가 심각했다는 뜻인지?
나당연합군들이 전쟁을 준비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보급문제를 등한시 하고 백제정벌전에 나섰을까?
 
김유신 등의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것도 당나라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 이 내용을 주장할려면 기본 사료부터 제대로 이해나 해석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 應之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춘을 순이라고도 한다.] 등으로 하여금
정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김영윤편>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였다.
 
적어도 精兵=정예병 이라는 漢文의 뜻만 제대로 알거나 사실대로 번역을 해도 
이처럼 허무맹랑하게 신라 정예군이 당군의 식량보급부대로 둔갑시켜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死士 = 결사대, 精兵=정예병" 삼국사기에 이런 군사용어들이 나오는데
전쟁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의 기능을 말하는 이런 용어들은 최소한 이해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음대로 왜곡하여 들이대는 것은 자신의 왜곡된 역사관과 지식을 자랑하는 부끄러운 짓이다..

그리고 당군이 백제정벌시 유인궤로 하여금 군량조달을 자체조달하는 과정의 사건내용이
자치통감 21권 666년 기사에 엄연히 나와 있어서 금방 들통나는 거짓주장이라는 것이 증명 된다.
 
나당연합군의 공격 때 사비성의 백제군 군량은 모두 불타버렸다.
나당연합군은 불타버린 군량창고 앞에서 당황했다.
===> 이런 내용의 기사가 있기나 있는가?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지 모르겠다.
의자왕은 좌우의 측근들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주하여 웅진성을 지켰다.
라고 하는데 야반도주한 의자왕이 무슨 청야전술이라도 펼친 것인가?    
그냥 5일간 웅진성에 틀어 박혀 있다가 버틸 가능성이 없으니 웅진성 방령 예식진도
의자왕을 설득했는지? 포박을 했는지?는 몰라도 허접하게 항복해 버린 것이 아닌가?
 
이들이 사비성에 입성한 것은 7월 초, 벼 수확을 위해서는 두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군량을 조달하는 유일한 길은 신라에서 공급하는 것뿐이었다,
===> 두달 동안 나당연합군이 백제땅에서 마냥 놀고만 있어야 한다는 논리인가?
 
손자병법 제2편 작전 내용에도 언급되어 있다.
전쟁은 승리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이지 결코 오래 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故兵貴勝, 不貴久

나당 연합군이야 5만 + 13만 = 18만 대군이니 백성들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을 포위 점령하여 
그곳의 관청이나 백성들의 식량을 수탈하여 군량으로 공급하면 되지만
두달 동안 웅진성을 포위만해도 고립된 웅진성의 식량이 먼저 바닥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따져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군량을 조달하는 유일한 길은 신라에서 공급하는 것뿐 이라니?
아래 손자병법을 참조해보면 그야말로 전쟁시 보급의 원리를 모르는 주장이 된다.
 

 
孫子兵法;第二篇 作戰[03]
지략이 뛰어난 장군은 가급적 이 편의 소모를 피하고 적국의 물자를 탈취해서 먹는다.
적한테서 탈취한 곡식 1종는 자국에서 멀리 수송해 온 20종에 해당하며,
적에게 탈취한 사료 1석은 자국에서 운반한 20석과 맞먹는 것이다.
故智將務食於敵. 食敵一鍾, 當吾二十鍾; (芑心)秆一石, 當吾二十石
 
그 흔해 빠진 손자병법서를 단 한번만 읽어보았어도 군량조달의 원칙을 바로 알 수가 있는데
아예 흔한 손자병법서 조차 읽어보지 못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백제는 국경을 따라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한 산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신라의 군량이 사비성까지 도달하려면 수많은 산성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백제의 산성에는 여전히 건재한 백제 지방군이 견고한 수비를 하고 있었다.
보급부대의 능력으로는 이들을 돌파할 재간이 없었다.
특히 신라에서 오는 보급로상에 위치한 진현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사비도성을 목표로 신속하게 진군한 나당연합군,
그 바람에 백제의 산성에 농성 중인 백제 지방군은 건재했고
이들은 연합군의 보급통로를 봉쇄할 충분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황산벌로 진군하는 신라 5만의 정예군이 탄현을 비롯하여 그 지역들을 경유하여 행군하질 않고
비행기로 날아서 사비성까지 도착했다는 말인가?
위의 주장대로라면 7월 29일자 백제 의자왕의 항복식에 경북 상주로 비정되는 금돌성에 머물렀던
무열왕 김춘추는 어떻게 밤하늘의 별처럼 촘촘한 산성을 뚫고 그리고 여전히 건재한 백제 지방군의
견고한 수비를 뚫고 사비성으로 왔겠는가?
이는 사료를 제대로 보질 않고 하는 주장인지? 고의로 왜곡한 주장인지?? 심히 의심이 된다.
 
실제로 백제가 부흥운동을 일으킬 때, 백제 군사가 진현성을 장악하고 있음으로써
신라에서 부여에 보급품이 전달되지 않아서 부여에 주둔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가 굶주림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당나라 군사는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웅진 동쪽 지금의 대전으로 출동했다가 몰살되기도 했다.
의자왕은 바로 이런 나당연합군의 치명적인 약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 오늘날 대전시 서구 용촌동 소재인 흑석동산성(黑石洞山城)으로 비정되는 진현성(眞峴城),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결사대가 고군분투할 때, 인근의 진현성(眞峴城)은 아무런 역활과 구실도 못했었다.
그러한 진현성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웅진성을 에워싼 나당연합군에게 위협이 되겠는가?
의자왕이 항복하고 무열왕 김춘추가 경북 상주 금돌성에서 충남 부여 사비성까지 도달 될때까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조롭게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저러한 진현성과 별처럼 촘촘한 산성의
기능과 역활이 제대로 발휘된 것이 없었는데도 도대체 무엇을 기대 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탄현에서 막았더라면 그나마 전쟁을 조금 더 오래 지탱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희망사항일 뿐!.

 
나당연합군이 사비도성에 들어가면 의자왕은 백제 지방군을 총동원, 사비성을 포위할 계획이었다.
의자왕의 전략대로라면 나당연합군은 두 달을 견디지 못하고 오히려 항복을 할 상황이었다.. 이후 생략
===> 이건 뭐 아예 환타지 소설 주장하는 분의 홀로 희망사항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라는 기사가 있음에도 대책은 무슨 대책?
게다가 사비성에서 벌어지는 작태는 더욱 가관이다.
 
"소 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
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바로 백제본기의 내용이다.
 
사비성에서도 체계없이 지리멸멸하였는데 대책은 무슨대책을 세웠다는 것인지?
무슨 근거로 저런 희망사항이 나왔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차라리 모르면 그냥 모르는대로 덮어 두는게 제멋대로 왜곡하는 것 보다야 훨씬 올바르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의자왕이 사로잡혀서 항복하게 된 것은 예식진이라는 부하장수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의자왕 자신의 실책에 따른 백제의 멸망이 초래된 것일 뿐
예식진이 배신을 했던 안했던 웅진성 함락되는 기간의 차이 정도에 불과 하다고 생각된다.
한 국가의 멸망이 군주 책임이 아니고 누구의 책임인가?
예식진의 행위는 이미 무너질도 무너져 한가닥의 승산과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국왕의 목숨을 보존시키고
웅진성내의 장졸들과 백성들의 무모한 희생을 막는데 일조를 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이미 한달전(2011, 8, 19일자)에 "을파소의 역사산책" 이라는 블로그에
그, 전문가들은 의자왕의 탁월한 전략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라는 제목으로 포스팅 되어 있어서
호기심에 유심히 살폈는데 오히려 본인의 내용보다 훨씬 설득력있는 매우 합당한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바 참고로 아래 주소로 링크를 시켰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http://history21.egloos.com/2839901  <=======  클릭 

다만 패망의 군주였기에 승자의 역사기록에 의존됨으로써 그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부각된 점이 많다는
동정론에는 일면 이해는 되나 그 보다도 가장 중요한 망국의 책임에 대한 실책은 모든 그의 장점을 덮어버리고도
남기에 그에 대한 좋은 평가를 기대하기 보다는 그의 실책을 더욱 경계하여 반복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으로
평가 되어야 마땅 하다고 본다.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의 명령을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었나? 역사관련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의 명령을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었나?

 

신라본기 무열왕 7년 기사 중에서

유신 등이 당 나라 군영에 도착하니, 정방은 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문영[潁을永으로도 쓴다.]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유신은 군사들 앞에서“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
라고 말하고,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노기 서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리되자 정방이 문영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다.         
 
<庾信>等至<唐>營, <定方>以<庾信>等後期,
將斬<新羅>督軍<金文穎>[或作<永>.]於軍門.
<庾信>言於衆曰: “大將軍不見<黃山>之役, 將以後期爲罪.
吾不能無罪而受辱, 必先與<唐>軍決戰, 然後破<百濟>.”
乃杖鉞軍門,
怒髮如植, 其腰間寶劒, 自躍出鞘.
<定方>右將<董寶亮>躡泣?: “<新羅>兵將有變也.”
<定方>乃釋<文穎>之罪.
 
당 고종이 당의 관직인 좌무위 대장군(左武衛大將軍)인 蘇定方을
나당연합군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을 삼았다.
 
이는 실질적으로 신라 무열왕까지 통제할 수 있는 나당연합군 총수(總帥)이다.

그렇다면 신라 무열왕은 大摠管도 못되는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대총관(副大摠管) 김인문 보다 낮은 직급의 나당연합군 편제이다.
그런데 대장군 김유신에게는 아예 나당연합군 관직이 없다.
 
바로 이부분에 주목해 보자.

위의 사료 내용으로는 소정방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진 그야말로 전시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소정방의 행위는 지극히 타당한 명령이다.
 
육도(六韜)의 제6편 견도 제51장(第6篇 犬韜 第51章) 분합(分合)
장수는 진영을 설치하고, 목표가 될 표주를 군문에 세우고, 무용자의 통행을 금지시키며,
각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립니다.
여러 장교들의 도착순에 따라 그 충성심을 헤아려서, 기한보다 먼저 도착한 자는 이를 상주고,
기한에 늦게 도착한 자는 이를 벱니다.
이렇게 상벌을 엄히 하면 원근을 불문하고 모든 부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삼군이 함께 이르러 전력을 모아 적과 싸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大將設營而陣, 立表轅門,
淸道而待.
諸將吏至者, 校其先後. 先期至者, 賞;
後期至者, 斬.
如此, 則遠近奔集,
三軍俱至, 幷力合戰

이렇게 육도의 병법서에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기일이 늦은 자는 반드시 참수를 시켜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신라군이 약속 기일을 어겼기 때문에 소정방의 행동은 병법상 당연한 조치로 보인다.

문제는 김유신 장군이다.

그렇다면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인 무열왕에게는 소정방의 명령이 통할 수가 있지만
김유신 장군에게는 나당연합군의 편제에서 빠진 통제권 밖의 존재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 병법서에서도 나와 있듯이 물론 육도 병법서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소개하지 않는다.
참고로 육도 병법서 "용도 21장 입장(第3篇 龍韜 第21章 立將)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무열왕이 백제 정벌을 위해 신라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부월(도끼)을 내린 상태로
이미 전쟁터에서 왕의 통제를 벗어나는 모든 권한 (전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경우에는 왕의 간섭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제 정벌전 전쟁터에서는 김유신 장군 마음대로라는 전제권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유신 장군의 입장에서는 당나라의 통제와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신라장수로써 신라군의 생사여탈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데 택도 아닌 소정방 네가 뭔데?
한마디로 이런 식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정방의 고집대로라면 당나라군과의 결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이다.
그가 당나라군과 관계없는 당당한 신라군의 總帥 라고 밝히고 시위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乃杖鉞軍門)

바로 저 도끼가 전쟁터에 나가는 총수에게 왕이 전제권을 부여하는 상징으로
부월을 내린다는 바로 그 물건이다

김유신 장군을 나당연합군 편제에서 무시한 결과가 바로 당 고종의 위엄과 소정방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겨버린 김유신 장군의 배짱은 그에게 내려진 바로 저 도끼(斧鉞) 때문인 것이다.

신라가 당나라 군량을 보급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약속 기일이 늦은 것에 대해
소정방이 김문영을 벨려고 했다는 주장은 어디서 나온 근거인지?
한마디로 개콘에서나 나올 법한 코메디이다. 
바로 백제 정벌전의 당군 보급을 책임진 유인궤가 풍랑을 만나 기일을 어긴 바람에 그책임을 물어
죽을뻔 했다가 웅진도독 유인원 밑으로 백의종군한 사실이 자치통감 21권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
(자치통감 21권 (도서출판 삼화 / 권중달역) 422~423 page 고종 건봉 원년(666년) 있다.     
“마침 백제를 토벌하게 되자 유인궤는 바다에 배를 띄워서 군량을 운반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아직 갈 수가 없었지만 이의부가 그를 독촉하자 바람을 만나서 배를 잃고 정부(丁夫) 가운데 
빠져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으므로 감찰어사 원이식(袁異式)에게 명령하여 그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계백편> 일부분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계백편>

○계백은 백제인으로 관직이 달솔이었다.
당 현경 5년 경신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했다.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를 방어하며 말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그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그가 황산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영을 치고 있다가 신라 군사를 만나 곧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였다.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들이 드디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사람마다 일당천의 전과를 올리자 신라 군사가 퇴각하였다.
이렇게 그는 진퇴를 네 번이나 거듭하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전사하였다.
 
○<階伯>, <百濟>人, 仕爲達率.
<唐><顯慶>五年庚申, <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濟海,與<新羅>
伐<百濟>. <階伯>爲將軍, 簡死士五千人拒之, 曰: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未可知也.
恐吾妻?,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遂盡殺之.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誓衆曰:"昔<句踐>以五千人, 破兵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遂?戰, 無不以一當千, <羅>兵乃却.
如是進退, 至四合, 力屈以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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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관창편> 일부분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관창편>

  
관창[관장이라고도 한다.]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그는 용모가 우아하여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곧잘 사귀었다.
16세에 기마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어느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
당 나라 현경 5년 경신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당 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데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사가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 품일이 관창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기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관창은 "그렇습니다"라 하고,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여러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
계백이 그의 투구를 벗게하니, 그가 어리고 용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백은 이를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기특한 사람이 많구나. 소년도 이렇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계백은 곧 그를 살려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 안장에 매어 돌려 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내 아들의 면목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줄을 알았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3군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의지를 다진 다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공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그 가족들에게 당견 30필과 이십승포 30필과 곡식 1백 섬을 부의로 주었다.
 
○<官昌>一云<官狀><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少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大宗大王{太宗大王}>.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 有志氣,
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其可無勇乎?”
<官昌>曰:"唯"
 卽上馬橫槍, 直?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 元帥<階伯>前.
<階伯>脫,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乃許生還.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以手?井水, 飮訖, 再突賊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十匹?二十升布三十匹?穀一百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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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김영윤편> 일부분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김영윤편>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였다.
가을 7월에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과 마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흠춘은 아들 반굴을 불러 말했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이 으뜸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만 충성과 효성이 모두 온전해진다.
” 반굴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戰, 不利.
<欽春>召子<盤屈>曰:"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唯."乃入賊陣, 力戰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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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60년) 기사 인용사료모음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기사

(의자)왕은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
 
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階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 竟敗, <階伯>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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