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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독자적인 천손으로 천하제일주의를 표방하며 700년간 중국의 여러 왕조들과 東北亞(동북아)의
覇權(패권)을 놓고 경쟁했던 大國 고구려와 현재를 비교할수록 과거의 영광은 더 크게 보여
우리가 더욱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재 신채호선생의 주장이래 그 영광에 종지부를 찍은 양, 신라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신라가 외세와 결탁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서 비롯된 것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과히 모욕적이다.
그러나
최 약소국인 신라의 외교 중심에 선 金春秋(김춘추)는 카멜레온처럼 변화와 實利(실리)를 좇아 끊임없이
탈바꿈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연계했다.
642년 그 첫 번째 대상이 고구려였으며 그 협상에 실패한 후, 金春秋의 발걸음은 倭(왜)와 唐으로 향했다.
그러나 구금된 순간조차 정탐의 시간과 기회로 활용했고, 거듭된 실패에도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ㆍ倭와의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그 경험은 뒷날 唐 太宗(태종)을 만나 협상을 성사시키는 데 귀중한 원천이 된것으로 보인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열정으로 「周遊天下(주유천하)」했으며
외교와 정신의 힘으로 약소국의 핸디캡을 극복했다고 생각된다.
구석진 신라의 폐쇄성, 廢位(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
이런 것들은 극복한 의지력이 그의 행동 곳곳에서 보인다
고구려는 두 차례 그를 잡아 죽일 기회를 가졌다.
642년 평양 방문과 649년 장안에서 돌아오던 歸路(귀로)에서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손 안의 金春秋를 두 번이나 놓침으로써 역사의 물길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이후 김춘추와 그의 가족들은 목숨을 담보로 한 그리고 놀라울 정도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다.
첫째로 金春秋 자신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아들들까지 멀고 어렵고 힘든 외교 첨병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열 살을 갓 넘긴 문왕은 아비 대신 인질이 되기 위해서,
법민과 인문은 請兵(청병)과 동맹을 위해서 각기 長安을 오갔다.
둘째로 첫딸로 추정되는 딸 고타소는 변방 성주의 아내가 되어 이미 대야성 함락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셋째로 셋째 딸 지소는 아비와 金庾信(김유신)의 틈을 메워 통일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예순을 넘긴 金庾信에게 출가했다.
그 후 元述(원술)이 唐과의 싸움에서 패한 후 살아 돌아오자, 아들을 끝내 용납하지 않았다.
넷째로 둘째 사위 김흠운은 왕의 사위임에도 백제와의 전투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쳤다.
다섯째로 羅·唐전쟁이 치열해지자 唐은 문무왕(金春秋의 아들)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하여
문무왕과의 이간을 시도했다. 唐의 향도가 된 고구려 男生의 역할을 인문에게 부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인문은 男生과 다르게 조국을 배신하는 唐의 향도가 되기를 거절했다.
그의 아들인 문무왕이 「東海의 護國龍(호국룡)이 되겠다」고 자신의 뼈를 동해에 뿌리게 했던
稀代(희대)의 애국심 또한 철저하리 만큼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아니던가?
金春秋의 사위·아들·손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딸들마저 나라의 일을 개인의 행복보다 우선했다.
그들은 권력을 누리기보다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위정자의 솔선수범은 當代(당대)는 물론 이후의 우리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통일의 동력은 지배계층의 살아 있는 정신인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에서 나왔고
이 점에서는 고구려·백제의 말기에 보여준 지도층의 행동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고 생각된다.
勝敗(승패)를 가른 요인은 깨어 있는 지도자였고, 일가의 희생이었으며, 바로 신라국민의 총화였다.
김춘추와 그의 가족이 보여준 행적이 바로 이런 것으로 오늘날 권력자나 지도자들이 국가가 위급할때
자신의 자제들을 외국으로 피신시키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병역면제를 시키는 행위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역사는 과거의 행적이 비추어지는 거울이다.
단지 외세와 결탁하여 민족을 친 반역자라는 성립되기 어려운 논리로 전체를 덮어버린
폄허와 비난의 시각보다는 그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처세와 최약소국이 마지막 승자의 길로
가는 길을 현명하게 인지하고 그길로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며 삼한의 통합대업을 이루는데
행동이었은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날 김춘추에 대한 비난은 당나라와 결탁하여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멸하였기 때문에 그는 사대주의 자요 같은 민족국가를 배반한 매국노라는 음모적 논리에
매장된 듯 하다.
매국노는 무었이며 사대주의는 무었인가?..
이들의 용어조차 잘못 사용되어 그의 비난에 총동원되고 있다
그가 당나라를 끌여들여 자칫 멸망할뻔 한것을 그의 아들 문무왕이 잘 마무리 했기 때문에
그가 한 일이 없다고 비난한다.
역사서에서 목숨을 건 그의 행적이 자세한데
이는 모두 무시한체 마냥 작의적으로 오로지 비난할 뿐이다.
그 삼한일통의 가능성에 도전한 국가나 삼국의 역대 제왕중 어느 누구도 試圖 하질 않았었다.
그래서 삼한일통 그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춘추와 김유신 이들의 명콤비가 도전한 삼한일통의 도전은 그야말로 힘들고 험난했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누구 보다도 솔설수범해야 했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해야 했었다.
어떠한 동기이든 발단이든 물론 김유신 장군과 같은 걸출한 인물의 도움도 컸었지만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멸망 시키는 수순부터 시작하여
삼한일통의 멀고도 어려운 대장정의 서막을 열어준 제왕이었다.
그를 비난하기전에 이전의 광개토왕이나 근초고왕은 왜? 삼한일통을 하지 못했을까?
광개토왕의 경우는 역사상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시기였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들은 희대의 영웅이면서 성인군자까지 되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삼한일통을
하지 않고 봐 준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기회를 백제, 신라를 멸망시키질 않고 돌봐 주어서 삼한일통의 기회를 무산
시켰다면 광개토대왕은 그야말로 희대의 코메디언 이나 아니면 가장 못난 제왕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럴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시작과 꿈조차를 가지지 아니했거나 시도를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삼한일통의 꿈을 누가 가지고 있었으며 누가 먼저 그 시작을 실천했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그 중심선에 김춘추, 김유신이 있었으며 그 과정의 김춘추는 삼국중 가장 모범적이며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하는 삼한일통의 과업을 시작했고 그 실천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했다.
단재 신채호가 민족사에서 최고 영웅으로 평가한 연개소문도 감히 삼한일통의 꿈조차 못 꾸었던 것을
김춘추는 이를 시작했고 목숨을 담보로 한 실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했었다.
그 결과는 역시 자신의 꿈대로 신라는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고의적이며 악의적인 음모론적 평가가 아닌 역사서에서 기록되어 나타나는 그의 행적을 정상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누가 감히 그를 비난할 수가 있겠는가?
출처 : http://cafe.daum.net/alhc/51qG/2077
본인이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카페에 올린 것을 수정 보충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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