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장군 비틀기 음모론 -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ml:namespace prefix = o /> 황산벌 전투일정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열전 계백편에서 발췌
1) 관직 달솔(2등관) 계백장군은 5천의 병력으로 황산벌에서 방어할 것을 의자왕으로 부터 명령을 받음
2) 이미 신라군과 당군은 탄현과 백강을 지난 상태
3) 계백은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라는
절망감에 빠짐
4)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서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임.
5) 계백은 미리 황산벌의 험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전투테세를 완비함.
6) 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정예병 5만의 군사들이 세갈래(3道)로 진군하여 황산벌에 도착 대치함.
7) 계백 장군은 전투직전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라고
결사대 군사들을 격려
8) 신라군의 4번공격을 잘 방어하여 신라군 퇴각으로 승리함.
9) 신라 김흠순 장군 아들 반굴이 돌격하여 분전하였으나 이를 전사시킴
10) 16세 화랑인 관창이 다시 돌격해와 이를 생포, 투구를 벗기고 확인
11)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라고
탄식하면서 관창을 되돌려 보냄.
12) 관창 재차 돌격해 옴으로써 사로잡아 목을 배어 돌려보냄
13) 이에 흥분한 신라군 총돌격
14) 병력부족으로 패배, 계백 전사,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됨.
위의 내용은 삼국사기 본기와 열전내용을 간추려 시차별 전투일정을 요약한 것이다.
유학자 권근이 “계백(階伯)이 명(命)을 받들고 장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장차 출정(出征)할
즈음에 먼저 그의 처자(妻子)를 죽였으니 그 무도(無道)함이 심하다. 라고 꼬집었듯이
장수가 전투도 해 보지도 않고 미리 패배할 것을 겁을 내어 자신의 처자식을 죽인 행위는
계백의 장수된 자질을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전투 직전에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얼마든지 적은 군사로써 승리한 사례를 알고 있음에도 미리 겁을 먹은 행위는
그 용렬함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처자식은 적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이끄는 부하들의
가족은 적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 승리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 되었으면 스스로 자결하여 자신의 군사
들이 투항이나 아니면 계속 전투를 할 것인지? 스스로 병사 자신들의 목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아량조차 베풀지 못함으로써 이것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행동으로 대부분 휘하 군사
들이 몰살하였으니 장수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참담하게도 수많은 생명을 잃게 만드는 행위라고
하겠다.
미리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여 세곳에 진영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미 병법에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적진을 앞에 두고 내부 단결에 문제가 생겨 좌평 충상과 상영등이 항복하는 사례가 발생된 것은
5,000의 결사대 전멸이라는 말은 후대가 지어낸 조작이라고 보여진다.
사료 어느곳에도 전멸했다는 내용이 없다.
병법에 익숙한 자가 상대의 분노를 자아낼 만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일순간에 패배하였으니 과연 장수의 자질이 있는지?도 심히 의심이 된다.
이는 관창의 목을 베어 되돌려 보낼 것이 아니라 사로 잡아 계속 되돌려 보내든지 아니면
적이 모공을 쓰면 같이 모공으로 대처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지략과 대처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순진한 것인지?
그리고 장수의 의지가 굳건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니 상승장군으로써의 자질 부족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해 놓고서는 전투직전에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라고
하여 네차례의 전투를 잘 방어했다가 관창의 용감함을 보고는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라고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의 의지가 이토록
오락가락 흔들려서야 부하들의 사기를 꺽는 것 이외 다른 무었이 있겠는가?
단재가 조선상고사에서 지적했듯이 계백장군이 진실로 영웅호걸이었다면 고구려 영류태왕이
의자왕 보다도 정사를 훨씬 덜 어지럽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 장군은 과감한 결단으로 혁명을
일으켜 백제보다도 10배에 가까운 당의 대군이 침략 했음에 1,2차 고당전쟁에서 당의 야욕을 꺽은
사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충과 흥수 같은 충신들을 귀양보내고 간신들에게 놀아나는
의자왕을 혁명으로써 제거하지 못한 계백의 무능력은 이와 같이 증명? 이 된다.
----- 나름대로 정리한 계백장군 비틀기의 음모론적 폄훼한 모델입니다-------------
만고의 충신이자 명장으로써 추앙을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들의 조상들의 업적을
자신의 사료분석 능력이 모자란 상태에서 음모론적인 궤변으로 폄훼 시키는 오류는 차라리 범하지
않는 쪽이 오히려 사료내용을 훼손 시키지 않는것이라 하겠다.
교차검증에 의한 과장이나 왜곡의 내용을 밝힌다면야 이는 매우 바람직 역사지식이 될지언정.....
하물며 비교적 사료가 많아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존경을 받았던
김유신 장군 마져도 사료들의 기사내용을 부정하고 음모론적 논리로 재평가 한답시고 과히 모욕적인
수준으로 폄훼할 정도라면...................................?
비록 계백장군뿐만 아니라 을지문덕 장군 역시 사료가 턱없이 부족한 마당에 이러한 음모론적 궤변을
늘어 놓으면 또한 해명하기란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위의 내용은 사료를 전체적으로 종합하여 사건전말을 고려치 않은 오로지 부정적인 면으로 비틀어 버린
전형적인 음모론적 궤변으로 포장된 내용임을 밝혀둔다.
모르면 차라리 모르는것으로 이해하는게 어쩌면 음모론적 사료비판보다는 훨씬 올바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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