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으로 보는 황산벌 전투에 대한 고찰 역사관련


병법으로 보는 황산벌 전투에 대한 고찰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7년 가을 7월 기사 에 있어서
 
신라본기 내용을 분석해 보면 신라군은 백제군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병사들도 기진맥진하였다
반굴이 홀로 진격해 분전하다가 전사하고 그 다음에 관창이 역시 싸우다가 죽음으로써
신라군이 비분강개하여 백제군을 대패 시킴 으로써 계백을 전사 시키고 승리했다는 내용이다.
 
신라본기에서 "4번을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 했다.이나  백제 본기에서는 4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다 라는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기사 참조 
이는 각자 입장의 차이에서 표현 용어일 뿐
신라의 4번 공격을 모두 물리쳤다는 내용과 다를 바 없으므로 별로 이상한 점이 없어 보인다.
 
아울러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계백편>을 검토해 보자
계백 열전에서도 진퇴를 4번이나 거듭하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계백이 戰死한 것으로 나온다.

이쯤되면 본기와 열전의 내용에 있어서 따져봐야 할 내용이 명백해 진다.
 
그런데 신라군의 4번 공격이 백제군의 철저한 방어로 모두 실패했다는 내용인데
열전의 내용과 대비해 보면 본기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임으로써
따라서 전해지는 古記내용을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극도로 축약시켜 기전체로 바꾸어
이를 본기에 입전시키는 과정에서 전투순서와 전투과정을 혼돈하여 뒤바뀌어 버린것이 아닌가?
또한 동일한 원사료를 가지고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끼워 넣기식 편집으로 분주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김영윤편> 내용에서는 본기와는 달리 김영윤의 아버지인 "반굴"의 내용이
나오는데 신라군이 4번의 전투패배 끝에 반굴이 출전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열전 참조>
언듯 보기에는 단독으로 백제 진영에 돌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전세가 불리해졌다 하여 애궂은 젊은 장교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어 전사시키는 명분 없는 희생에
수뇌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커질 뿐, 이미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의 전율과
혐오감만 증폭시키는 일이 될 뿐이다.
 
삼국사기 권 제 47  열전<관창편>을 검토해 보면 관창을 정상적으로 출전시키는 내용이며
단기필마의 자살 특공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반굴 편에서 말했듯이 관창 또한 4번 전투의 패배 끝에 사기 진작용으로 관창을 희생타로 날린
자살특공대로 투입된 내용이 아니었다고 사료 된다.    


★. 우선 정리를 해 보면
반굴과 관창은 사기진작용으로 자살특공대가 아니라 정상적인 공격부대로 참전한 것으로 사료된다
신라군 공격이 두차례(=필자 계산에 의함)나 무위로 끝남에 따라 신라군의 사기가 저하되었으며
부총수(副總帥)인 우장군 흠순공이 자신의 아들인 반굴을 제3차 돌격대 또는 공격부대에 출전시킴으로써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먼저 실천하게 된다.
따라서 출전하는 아들에게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이 으뜸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만 충성과 효성이 모두 온전해진다.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라고 격려를 하여 전쟁에서 물러서지 말고 최선을 다해
모범을 보이라는 내용이다.
 
역시 동급 부총수(副總帥)인 좌장군 품일 역시 자신의 아들 관창을 제 4차 공격부대에 투입시켜
신라군의 책임 장수로써 역시 솔선수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게 된다.
첫 출천하는 자식에게 “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기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爾雖幼年, 有志氣,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其可無勇乎?”>
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보건데
혼자 가서 죽으라는 내용이 아니고 공격 부대에서 열심히 싸워 공을 세우라는 격려하는 내용이다.
 
이것이 와전되어 마치 관창을 단독으로 적진에 돌격시켜 죽음으로 내모는 것으로 오해되는 부분이다.
이 와전은 삼국사절요 권근의 논찬과 단재의 조선상고사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관창의 공격부대 역시 실패하여 패퇴를 당하고 관창은 포로가 된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而彼衆我寡>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
라는 열전의 내용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신라군이 사기 진작용으로 어린 관창을 자살특공대로 활용했다는 비난을
하지만 이는 곧 사료해석을 곡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돌발현상이 벌어진다.
계백장군은 자신의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마음으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황산벌로 출전했던 까닭에
차마 어린 관창을 베지 못하고 돌려 보낸 것이 큰 실수이며 화근이 되어버렸다.
이 부분은 병법상 으로는 대 실수로 보인다.
물론 도덕상으로는 천하의 군자(君子)이며 덕장(德將)의 면모이기도 하지만
도덕성 보다는 승리가 목적인 전쟁이라는 생리에 있어서는 패배의 조건인 실패일 뿐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계백에게 사로 잡혔다가 석방되어 다시 되돌아 온 관창은 심한 수치감으로 다음과
같은 돌발적인 행동(“"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向吾入賊中, 不能斬將?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을 하게 된다.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결국은 죽음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관창의 돌격부대까지 패배를 당하면서 신라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지만 관창의 돌발행동에 따라
엘리트 청년 장교들의 솔선수범 죽음으로써 전투에 임하는 신라군의 사기는 두 엘리트 젊은 장교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三軍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의지를 다진 다음 총공격하여 계백의 부대를 전멸시키다는
것이 사료의 내용이다.

이쯤에서 병법서 내용에 의거 전투양상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병법서 육도(六韜) 제5편 표도(豹韜) 第50章 분험(分險)에 의하면
 
“험난한 산지에서 싸우는 방법은
(凡險戰之法)
무충차를 앞에 배치하고, 큰 방패로 수비하며 힘센 군사와 강한 쇠뇌로 아군의 좌우 양익에 배치하며
(以武衝爲前, 大櫓爲衛, 材士强弩翼吾左右)
3천명으로 한 부대를 삼고, 한 부대마다 반드시 사무충진을 두어 편리한 지형에 병사를 의거케 하고,
(三千人爲屯, 必置衝陣, 便兵所處)
아군의 좌익군은 적의 좌익을 공격하고, 우익군은 적의 우익을 공격하며, 중군은 적의 중부를 공격하도록 하여,
(左軍以左, 右軍以右, 中軍以中)
전군이 동시에 호응하여 공격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나아가 싸운 자는 진영으로 돌아와 쉬고,
(幷攻而前.已戰者, 還歸屯所)
교대로 싸우고 교대로 쉬게 하면서 승리를 거둔 후에야 전투를 그치는 것입니다.”
(更戰更息, 必勝乃已)
 
황산벌 전투에 있어서
계백 장군이 험지에 의지하여 三營을 갖추었다면 김유신 장군 역시 三道로 나누어 계백의 삼영이 유기적인
협력을 못하도록 견제하면서 이미 나아가 싸운 자는 진영으로 퇴각시켜 돌아와 쉬게하고 다음 공격부대 하여금 
교대로 싸우고 교대로 쉬게 하면서 
숨쉴 틈 없는 공격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서는 반드시 전투의 원칙이 있으며, 병법을 잘 아는 장수가 자신의 병사들을 무모하게 희생시키는
어리석은 전투를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손자병법 제4편 군형(軍形)편 내용 중에서
선전자는 당초부터 패배하지 않을 태세를 갖추고 적이 패배할 요소를 포착하는 데 실수하지 않는다.
(故善戰者, 立於不敗之地, 而不失敵之敗也)
 
손자병법 제6편 허실(虛實)편 내용 중에서
적군의 명확한 태세를 조사하여 그들이 패배할 지세와 패배하지 않을 지리를 얻고 있는가를 파악해야 하며,
적군과 충돌을 일으켜 보아 병력의 우세한 곳과 부족한 곳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形之而知死生之地, 角之而知有餘不足之處)
 
김유신 부대는 계백진영의 전투능력과 형세을 파악하면서 연속적인 공격에도 계백 진영의 흐트리짐 없는
결사항전에 신라군의 사기가 많이 저하된 것을 분석한 신라 수뇌부에서는 급기야 자신의 자제들을 투입하는
돌격대를 편성하여 공격을 감행시킨 것으로 보인다.
 
반굴에 이어 관창의 돌격부대까지 패배를 당하면서 신라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지만 관창의 돌발행동에 따라
엘리트 청년 장교들의 솔선수범 죽음으로써 전투에 임하는 신라군의 사기는 두 엘리트 젊은 장교의 죽음에
도화선이 되어 三軍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자 신라 수뇌부가 그 점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손자병법 제2편 작전(作戰)편 내용 중에서
적을 죽이려면 적개심을 격발시켜야 한다.
(故殺敵者, 怒也)
 
전쟁에서는 무엇보다도 명분이 앞서야 하며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앞서야만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은 병법상에 있어서 항상 강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명분과 적개심으로 군사들의 전투의지를 간파한 후에는 즉시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것은
병법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손자병법 제5편 병세(兵勢)편 내용 중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이 돌까지 뜨게 하는 것은 기세가 맹렬하기 때문이다.
(激水之疾, 至於漂石者, 勢也)
또한, 사나운 새가 질풍과 같이 짐승을 급습하여 그 뼈를 부수고 날개를 꺾는 것은 절도(순발력)가 있기
때문이다.
(鷙鳥之疾, 至於毁折者, 節也)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그 기세가 맹렬하고 그 절도가 극히 짧다.
(是故善戰者, 其勢險, 其節短)
그 기세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것과 같고, 절도는 화살이 발사되는 것과 같다.
(勢如彍弩, 節如發機)
어지럽게 헝클어져서 전투가 난전이어도 흐트러지지 않고,
(紛紛紜uc0紜, 鬪亂而不可亂也)
뒤섞이고 혼전이 되어 적의 진형에 포위되어 도 패배하지 않는다.
(渾渾沌沌, 形圓而不可敗也).
 
반굴과 관창의 죽음으로 인해 비분강개한 군사들의 사기를 이용, 총공격을 단행하므로써 이처럼 사나운 기세로
돌풍처럼 공격하여 적을 섬멸시킨다는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병세편의 내용이다


결국 황산벌 전투를 정리하다 보니
 
1. 계백은 왜 삼영(三營)으로 나누었나?
   성안에서 방어하는 농성전을 할 수 없는 입장이다..신라군이 공성전을 무시하고 도성으로 直攻 하면
   그 行軍을 저지할 수 있는 양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10배가 넘는 군사력으로는 반드시 포위 작전으로
   나오기 때문에 삼영으로 나누어 포진함으로써 포위를 할 수 없도록 황산벌에서 三營을 구축한 것이다.

2. 김유신이 삼도(三道)로 나눈 까닭은?
    계백이 포위공격이 불가능하도록 三營의 陣營을 펼침에 따라  三營이 상황에 따라 합쳐지고 나누어지면서 
    陣榮간의 유기적인 방어 전술을 구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견제하기 위한 三道의 나눔이다
 
3. 황산벌 전투는 결국 평원(야산, 언덕, 강둑등 비교적 평지에 가까운 지역)의 험지로 사료된다
    반굴이나 관창이 계백진영으로 돌입한 것으로 보아 계백의 진영은 산성이나 평지의 성(城)은 될 수
    없으며 만일에 계백이 성안에서 농성전을 펼칠 경우 신라군은 공성전을 무시하고 오히려 일부의 병력으로
    성밖의 험지에 역으로 진영을 갖추어 성안의 계백군을 저지하고 나머지는 도성을 향해 직공을 한다면  
    겨우 방어만 가능할뿐 도성으로 진격하는 신라군을 저지 할 수가 없는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4. 신라군과 계백부대는 전투에서 삼국사기의 기록 차이를 보면  
   신라본기 무열왕 7년 기사에서는 "4번을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군졸들을 힘이 다 빠져 버렸다" 라고 했고
   백제본기 의자왕 의자왕 20년 기사 내용은 "4번 싸워서 다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라고 했으며
   열전<계백>에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사람마다 일당천의 전과를 올리자 신라 군사가 퇴각하였다 이렇게
    그는 진퇴를 네 번이나 거듭하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전사하였다."
그리고
   열전<김영윤> "백제 장군 계백과 마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흠춘은 아들 반굴을 불러 말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4
번 싸워 승리하지 못했다, 또는 전세 불리 라고 표현한 신라본기와 김영윤 열전
   4번 싸워 다 이겼다, 또는 일당천의 전과를 올리자 신라 군사가 퇴각 이렇게 진퇴 4번 이라는 백제본기와
   계백 열전의 내용 차이는 각국의 입장을 고려한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사료입전의 방식이라 추측된다.
   만일에 있어서 백제측 기록대로 4번 싸워 4번을 승리했다면 그 기세로 신라군 전체를 궤멸시켜야 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의 수보다도 군사들의 사기와 그 승세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최후의 승리를
   이루내는 병법 운용중에서 기회포착의 원칙이다.
   백제본기 기록대로라면 계백은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고 병법 운용상의 미숙을 드러내는 기록이 된다.
   그래서 백제본기의 4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는 표현방식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김유신은 4번의 공격을 시행하면서 계백이 반격할 틈과 여유를 주질 않고 병법을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계백이 4번이나 승리를 하였음에도 그 승세의 기회를 삼아 반격의 기회를 단 한번도 잡지 못한채 방어에만
   급급하다가 결국에는 군사수가 모자라 패배하고 만 것이다.
 
   
관창은 공격부대를 따라 출전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투입부대가 계백의 방어군 수보다 모자라 패퇴함에 따라  
   관창이 포로가 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기전체로 축약시켜 변형시킨 삼국사기 본기내용
   보다는 오히려 신라고전에 가까운 열전의 내용에 더욱 신뢰성의 무게가 실린다고 하겠다.
   
5. 백제군 결사대 5,000명은 의자왕이 직접 계백에게 출전을 명령한 것으로 계백이 선발한 결사대이며
    황산벌에서 總帥(삼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역할은 계백이 실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열전 관창편에서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
    (爲賊所虜, 生致 百濟 元帥 階伯前)

    여기서 3군을 지휘하는 元帥 階伯 이라는 직위가 분명히 나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는 신라 5만의 정예병을 이끈 總帥는 太子 김법민이 아니라 大將軍 김유신이기 때문이다 
 
6. 그렇다면 달솔의 관등보다 높은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은 어떤 존재인가?..
    계백을 지원하는 부대이거나 계백에 예속된 것으로 보인다..높은 관등이라고 하여 반드시 총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좌평의 높은 관등으로 달솔의 예하에 속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쉽게 신라군에게 내통
    또는 항복한 것으로 보인다..
    처절하게 항전하다가 항복할 경우 그 부대의 최고 책임 장수는 반드시 죽이는게 통례인데 반해
    좌평 충상과 상영은 항복 이후에 신라의 관직을 얻어 백제부흥군 토벌등에 활약 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처절하게 항전한 결사대의 總帥(元帥)가 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좌평 충상과  상영은 의자왕의 명에 의하여 중앙군사를 받아서 출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군사들을 모집하여 계백의 결사대에 지원하는 형태로 계백이 三營으로 나눌때 각 一營씩 편재하여
    나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군은 가장 정예부대인 계백의 營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이를 격파하자
    충상과 상영이 이끄는 다른 二營은 전투를 포기하고 도주하거나 일부 지휘관들은 스스로 항복하여
    포로가 된것으로 추정된다..따라서 이들의 군사수는 좌평급에 해당하는 군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계백의 5천 결사대에 못미치는 매우 모자라는 군사들을 급조하여 출전한 것으로 판단된다.

7. 김유신 부대는 당나라군의 군량을 지원하는 보급부대 역할을 했다 라는 주장들이 더러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本記에서나 열전<김영윤>에서 정예병(精兵)으로 되어 있는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又命太子與大將軍<庾信>․將軍<品日>․<欽春>[春或作純]等, 率精兵五萬, 應之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 흠춘[춘을 순이라고도 한다.] 등으로 하여금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응원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영윤편>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였다.
    
   
김유신 열전에서만 나오는 柳蓆(유석) 즉 버드나무 돗자리는 기벌포 해안으로 상륙시 갯벌을 통과하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도구로써, 기벌포 해안에 대한 정보를 잘알고 있는 신라가 공급한 것으로써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수군을 통해 전달 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식량의 보급품 조달은 각종 병법서에서도 가장 중요시 하는 대목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13만 대군의 식량 보급품을 가지고 기동전을 요구하는 전투 정예부대에게 육로로 수송 시킨다는 것은
    전투상식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전투 생리상 보급품 조달 조건을 무시한 명백히 곡해이다.  

   손자병법 제7편 군쟁(軍爭)편 내용 중에서
    군대에 수송 보급이 없으면 패망하고, 식량이 없으면 패망하고, 쌓아둔 물자가 없으면 패망한다.
   
是故軍無輜重則亡, 無糧食則亡, 無委積則亡
 

    하물며 병법서에서도 이러하거늘 당군이 전쟁을 위한 원정길에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식량의 보급품을 
    전적으로 동맹군에게 의존한다는 자체가 넌센서 이다.
 
    이에 대해 백제 정벌군으로 파병된 당의 소정방군에게 군량보급 수송에 관한 기사내용이 다음과 같이 
   자치통감 21권 (도서출판 삼화 / 권중달역) 422~423 page 고종 건봉 원년(666년) 있다.     
    
    “마침 백제를 토벌하게 되자 유인궤는 바다에 배를 띄워서 군량을 운반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아직 갈 수가 없었지만 이의부가 그를 독촉하자 바람을 만나서 배를 잃고 정부(丁夫) 가운데
    빠져 죽은 사람이 아주 많았으므로 감찰어사 원이식(袁異式)에게 명령하여 그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당군은 백제 정벌시 자체 보급품을 어렵게 조달하는 내용이 뚜렷하게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인궤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현경5년(660) 12월에 웅진도독 유인원 예속으로 백의종군하는
    수모를 격게 되지만 후일에 웅진도독으로써 활약하게 된다.
    
    비록 우연일치 일지라도 자치통감을 인용한 내용은 "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러그 에 2011/08/17자로
    먼저 포스팅 되어 있었으므로 본인의 주장과 일치하는바 참고로 링크해 놓는다.     
   
초록불 잡합다식 <"백제 침공 당군의 보급 문제 외"> 기사로 바로가기

    이로써 신라의 정예 5만의 김유신 부대가 당군의 식량을 보급하는 부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일 뿐이다.
  
    이 처럼 병법서를 통해서 해석하면서 주변 사료들을 교차검증하면
    당시 치열했던 황산벌의 전투양상과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전에 대한 양상을
    보다 합리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사료된다.


덧글

  • 초록불 2011/09/21 10:53 #

    재미있는 내용 잘 보았습니다...^^

    사료야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세밀하게 살피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인데, 과하게 신경 써주셨네요. 감사합니다.
  • 駕洛之胤 2011/09/21 11:05 #

    특히 블러그를 개설하고 첫번째 초록불님의 방문은 영광입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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