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년 관산성 전투 재고찰 역사관련

554년 관산성 전투 재고찰
 

이 사건은 기전체인 삼국사기의 기록이 너무 소략하여 삼국사기의 내용만으로는
매우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 된다.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554년(백제 성왕 32년, 신라 진흥왕 15년, 고구려 양원왕 10년)
7월에 관산성 전투가 발생되어 성왕이 전사하고 장병 2만9천6백명이 참살 당했다는 기록이다.
     클릭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554년) 기사 참조
 

그리고9월에는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의 죽음으로 대패한 초상집에서 기적같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필을 약탈해 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클릭 ---> 삼국유사 기이 진흥왕편 기사 참조
 

이 내용으로는 국왕이 전사한 패전의 심각한 휴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초상집에서 대규모의 군사동원하여 복수전을 펼친 것으로 된다.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며 납득조차 하기 힘든 내용이다.

더욱 납득하기 힘든 것은 고구려의 행동이다.

고구려는 10월달에 대규모의 군사를 내어 백제 수도 근방인 웅천성을 공격한다.
     클릭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위덕왕 원년 (554년) 기사 참조
     클릭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10년 (554년) 기사 참조 
 

아무리 웬수같은 적국이지만 비록 弔問(조문)사신을 보내지는 못할 망정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초상집을 침략하는 경우는 명분을 중요시 했던
고대의 전쟁 생리상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며
신라의 영토를 뛰어 넘어 백제 수도까지 쳐들어 갔다는 것은 더욱더 납득하기 힘들다.
 
백제가 잘 방어하여 고구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사실이라면 국왕및 좌평4인의 국가 수뇌부의 초상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한 백제의 괴력에 혀를 내 두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내용은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비로소 납득이 된다.
 
554년 5월에 군사를 내어 6월에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사와 더불어
12월 9일에 신라를 공격, 函山城(관산성으로 추정)을 공격, 함락 시켰다는 내용과
이를 알리기 위해 왜국의 흠명천황에게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으므로
     클릭 --->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554년) 기사 참조
 

적어도 백제 성왕은 554년 겨울 12월 9일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위의 불가사이한 전투 기록사가 최소한 납득할 만해진다.

이를 다시 재구성해 보면 그 전말은 이러한 내용이 된다.

일본의 왜군이 5월에 군사를 징집하여 6월에 백제에 도착하였으며
왜군과 가야병이 집결되자 백제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7월 부터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한다.

9월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백제왕자 여창의 활약이 눈부시다.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필을 약탈할 정도로
백제는 서전을 장식하면서 기세를 올린다.

이에 신라에서는 각간 우덕과 탐지등으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도록 하였으나
백제의 강한 공격력으로 신라는 苦戰을 계속한다.

이에 신라는 평양성 함락시 고구려를 아예 멸망시킬때까지 끝장을 내자는
백제 성왕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이를 무산시켜 준 댓가로써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한다.
 
고구려 역시 백제의 성왕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위해 신라가 길을 열어 준 영토(한수 지역)를
가로 질러 아예 백제수도인 웅천지역으로 진격 웅천성을 공격한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이미 신라와 전투에서 매번 승리한 기세로 사기가 충천한 상태에서 
자신의 영토에 깊숙히 들어 온 고구려군과 잘 싸워 이를 물리 치게 된다.
 
고구려군과 전투를 하는 동안 백제의 공세가 주춤하는 사이
신라는 한숨을 돌리며 전투력을 재정비한다.
고구려군은 백제영토 깊숙한 곳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하여 퇴각해 버린다.
 

이를 관망하던 신주의김무력부대는 고구려군이 퇴각을 함에 따라  급기야는 관산성 전투에 나서게 된다.
 

고구려군을 물리친 백제는 사기충천(士氣衝天)하여 다시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시키게 된다.
 

거의 7월부터 겨울 12월까지 장기간 치뤄지는 전투에서 승리를 한
왕자 부여 창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좌평4인과 50명의 근위병만 대동한채 관산성으로 향하는데
가야출신 김무력 부대의 첩보망에 의해 노출된 백제 성왕의 행군로를 파악한 후에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를 성왕의 행군로 길목에 매복시켜 성왕을 사로 잡아 살해해 버린다.
      (대략 연합군중 가야인의 첩자를 이용한 것으로 추측)
 

이것을 빌미로 승승장구하던 백제군은 국왕의 전사에 패닉(Panic)상태가 되고
반면에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단숨에 전세는 역전되고
왕을 비롯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 당하는등 대패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관산성 전투의 전말이 아닌가? 한다
    

그래야만 9월에 삼국유사에서
소개된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갔다는 기사가 성립되고

10월에 고구려가 신라영토를 가로질러
 백제 수도지역 웅천성까지 진격해 전투를 벌였던 내용이 성립 된다.
 
적어도 12월 9일 까지는 일본 서기에 의해
백제 성왕은 전사하지 않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제동맹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일본서기,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킬려고 했던 백제 성왕의 요구를 무시하고 나제동맹을 파기하여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고구려의 회복을 도와 줌에 따라  
광개토대왕시기에 구원받았던 빚을 나제동맹 파기로 제대로 갚아준 셈이 된다.
그리고 신라는 한강유역을 얻어 중국과의 교역로를 확보하여 중국과 활발한 교역으로
신 문물등의 유입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삼국의 최후 승자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진흥왕의 배신으로 볼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가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면 백제의 국력은 그야말로 엄청난 대국이 되는데  
이웃 백제의 국력이 거대해 지면 상대적으로 신라는 백제의 지배력에 들거나 속국화 또는 멸망의 수순을 밟는게
당연지사 진흥왕이 그런 수순을 모를리가 있겠는가? 
약체인 신라는 고구려-백제가 서로 견제하고 그사이 자신은 국력을 키워나가고 실리를 취하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돌궐의 침략으로 북쪽조차 정리를 못한 마당에 백제 왜국 신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
당하는 등
최대의 위기에서 신라가 오히려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에 접근하여 밀약을 맺어줌으로써
고구려는 한수지역을 포기하고 신라에 내어주는 것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게 되어 국력회복의 기회를 얻게된다
반면 백제는 신라의 배신감에 왜국과 가야를 끌여 들여 신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관산성에서 국왕인
성왕이 전사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이후의 신라-백제간의 역사는 피 터지는 난타전 보복 전쟁의 역사로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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