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제동맹 파기는 배신의 달인인가? 선견지명의 달인인가? 역사관련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433년(고구려 장수왕 21, 신라 눌지왕 17, 백제 비유왕 7)에 우호관계를 맺으며 나제동맹을 맺었다.
이후 진흥왕의 나제동맹 파기로 인해 신라와 백제는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처절한 피의 전쟁사로 돌입하게 된다.
120년간 이어온 나제동맹이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깨어지게 된 사유와 그 배경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우선 일본서기 제 19권 흠명천황 23년 (562년) 8월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 클릭
 

◆8월 천황이 대장군 大伴連狹手彦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狹手彦은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狹手彦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七織帳,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
[옛 책에 “鐵屋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七織帳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2벌,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五色幡 2竿,
미녀 媛[媛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吾田子를 蘇我稻目宿녜 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輕의 曲殿에 살게 했다.
[鐵屋은 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히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편의 기사와 일본서기와 연관을 지어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눈에 뜨인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양원왕)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이 기사 내용에서  흠명천왕 11년은 5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경오년(庚午年; 550) 신라 진흥왕 11년, 고구려 양원왕 6년, 백제 성왕 28년이 되는 해인데
문제는 550년 사건의 내용이 아니라 이듬해인 진흥왕 12년, 고구려 양원왕 7년, 백제 성왕 29년이 되는 551년의
사건내용 이다.
 

<백제 본기>
성왕28년(550년) 봄 정월, 왕이 장군 달기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을 공격케 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을 포위했다.

성왕29년 기사는 누락됨

<고구려 본기>
양원왕 6년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3월,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북제가 왕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양원왕 7년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 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신라 본기>
진흥왕 11년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점령했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찬 이사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여 두 성을 빼앗아 성을
증축했다. 군사 1천명을 그 곳에 머물게 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위의 550년 사건의 기사들로 보아 본질적으로 나제동맹 자체가 공고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 남.)

진흥왕 12년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이를 기회로 열 곳의 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백제본기에서는 모두 3월까지만 나타나고 이후는 모두 누락되어 있다.


다만 고구려 본기에서는 양원왕 6년 가을 9월,
 북제가 왕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라는 기사
이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칠부의 열전에 이런 기사가 있다.

진흥왕 12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

따라서 일본서기의
어떤 책에는 “11년(흠명천왕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陽香을 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라는 기사는 12년으로 수정되어야 하며 일본서기의 년대 삽입 오류인듯 하다.
따라서 흠명천황 12년 즉 551년 시기의 사건에 해당된다.
 

551년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공격으로 북쪽 신성으로 지원군이 이동되는 것을 틈타
백제와 왜국 그리고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 당하자 양원왕은 탈출을 하고  백제 성왕은 이 기회를
틈타 계속 진격하여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했으나  신라 진흥왕은
"나라가 흥하고 망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 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겠느냐."
하면서 고구려와의 전면전에 부담을 느낀 신라 진흥왕은 백제의 진격요청을 거절하게 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신라에 한강유역을 양보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고 닭 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격이 되어 버린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면서 이후 554년 관산성 침공을 하게된 발단이 되어 버린 사건이다.
 

일본서기 권 19  欽明天皇편에 다음 기사가 흥미롭다.
13년(552) 5월 戊辰 초하루 乙亥  百濟‧加羅‧安羅가 中部 德率 木리今敦‧河內部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가 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라고 백제 성왕은 왜국 흠명천황에게 청병을 한다.


그렇다면 552년 5월 이전에 이미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왜국에
청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에 소개된 흠명천황 13년(552) 마지막 기사가 눈에 뜨인다

☆『日本書紀』卷十九欽明天皇十三年(五五二)
是歲。百濟棄漢城與平壤。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地名未詳。〉
일본서기(권19 欽明天皇)13년(552)
*이 해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尼彌方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계유년(癸酉年; 553) 신라 진흥왕 14년
○가을 7월 신라에서 백제의 동북 변방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 김무력(金武力)으로써
군주(軍主)를 삼았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553년 신라가 백제의 동북부를 빼앗고 신주를 설치한 이후 부터 나제동맹이
파기된 것으로 보고있다. 바로 3달 후 백제 성왕의 딸과 진흥왕이 혼인을 했기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계유년(癸酉年; 553) 신라 진흥왕 14년
○겨울 10월 신라왕이 백제의 왕녀(王女)를 취하여 소비(小妃)로 삼았다.

 
그러나 위의 본문에서 언급한 대로 551년 백제, 신라, 왜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한강유역을 대부분
차지한 이후 계속 진격할려고 한 백제 성왕과 이를 만류하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파기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552년에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리자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다.라고 한다
백제 성왕은 왜 그토록 힘들게 빼앗은 한성과 평양성을 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을 뒷 받침하는 내용이 바로 위에 소개된 일본서기 흠명천황 13년(552년) 5월 기사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를 공격할 계획으로 왜의 흠명천황에게 청병을 하는 가운데 한성과 임나(가야)를 저울질 하는게 눈에 뜨인다
따라서 성왕은 신라와 고구려를 함께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찼기 때문에 한성과 평양성을 버린게 아닌가 싶다.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왜군과 가야군을 끌여들여 연합군을 결성한 것으로써 한성과 평양성을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남부 가야지역에 공을 들이면서 왜군을 끌여들여 1차적으로 신라를 토벌하고 한성과 평양성을 수복할려는
전략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위의 본문에서 나열된 일련의 기사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나름대로 재구성해 보면

550년에 고구려의 도살성을 백제가 빼앗았고 백제의 금현성을 고구려가 빼앗았던 것을 신라가
이들 2성(도살성,금현성)을 가로 채어 빼앗은뒤 증축하여 꿀꺽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백제이든 고구려이든 신라에게 별다른 반응이 없고 특히 백제와 신라는 계속 동맹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551년 고구려의 양원왕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북쪽 변경에서는 돌궐이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고
있었던 시기로 게다가 남쪽 변경에서는 백제-왜-신라 연합군의 파죽지세 공세로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대부분
상실하고 평양성(남평양성=한수이북으로 추측)마져 함락 당하는등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견제하면서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하게 됨에 따라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포기하고 신라에 넘겨주는 형태가 되었다. 
아울러 백제는 한성과 평양성의 기세를 몰아서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고구려와의 전면전에 부담을 느낀
신라 진흥왕의 거절로 인해 좌절되어 왜국과 임나(가야)국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552년 5월에 백제 성왕이 왜국의 흠명천황에게 신라를 치기위한 군사를 요청하고 있다.
그 내용은
흠명천황 13년(552) 5월 戊辰 초하루 乙亥  百濟‧加羅‧安羅가 中部 德率 木리今敦‧河內部 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高麗가 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의 양국에 부담을 느낀 성왕은 결국 한성과 평양성을 포기해 버린다
이후 554년 7월까지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기록이 보이지 않아 백제 스스로가 한주지역을 포기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 해(552년)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新羅의 牛頭方·尼彌方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553년 7월에 백제가 포기해 버린 한주지역을 신라가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軍主)로 삼아
         자국의 영토로 편입을 하게 된다.
         겨울 10월 백제본기에서는 왕의 딸을 시집 보냈다고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의 기록은 의외로 백제의 왕녀(王女)를 취하여 소비(小妃)로 삼았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에 대해 이미 경계를 하고 성왕에게 수모를 주는 태도를 취한다
 

 
554년 5월 왜국의 군사를 내어 6월에 백제에 도착,
7월 부터 백제-왜-가야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시작
9월에 백제 성왕은 신라의 진성을 침범하여 남녀 3만9천명과 말 3천 필을 빼앗아 감으로써 서전을 장식한다.

10월에는 신라가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로 사료되며 고구려는 대규모의 군사로 백제 웅천성을 공격
     하였으나 백제는 이를 물리치고 고구려는 패한채 퇴군하고 말았다.

  
그러자 백제는 이를 잘 수습한 뒤에 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12월 9일에 신라의 각간 우덕, 탐지등을 물리치고
관산성을 함락시킨다. 다급해진 신라는 급기야 신주의 김무력 부대까지 합류시켜 전투를 치루게 한다.
신주의 김무력 부대가 합류한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가 이루어 진것은 확실해 보인다
 
554년 7월 부터 12월 까지 장기간 벌어진 백제의 승리에 힘입음과 동시에 이때 뛰어난 활약을 한 백제왕자 
부여창(=위덕왕)을 칭찬하고 오랜 전투의 노고를 위로 하기 위해 50명의 수뇌부를 이끌고 갔다가 김무력 부대의
첩보술에 의해 매복에 걸려 그의 비장인 삼년산군 고간 도도에게 사로잡혀 전사를 하게 됨에 따라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은 대패를 당하게 된다.
 
이로써 120여년간의 나제동맹은 깨어지고 이후의 백제와 신라와의 역사는 철전지 원수지간으로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휘말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진흥왕은 왜 나제동맹을 파기했어야 했나??
 
결론적으로 위의 본문에 나타나듯이 신라는 지형적으로 한반도 동남쪽 끝부분 궁벽진 곳에 위치하여 자체적으로는
중국의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불가능하며 바닷길로써는 너무 멀다.
법흥왕 이전의 신라는 그야말로 삼국중 가장 후진성을 면치 못할 정도로 문화적으로나 국력적으로나
가장 뒤처져진 국가였다.
 
그러나 법흥왕대 불교가 유입되고 고구려-백제에 의탁하여 사신을 파견하고 대륙의 중국을 접한 이후 신라는
다른세계의 문명에 놀랄수 밖에 없었고 이는 곧 대륙과의 교류만이 살아나갈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닳게 된다.
 
그래서 신라가 가장 필요로 햇던 것은 중국과의 연결되는 통로 확보이다. 바로 한강유역과 경기만 일대이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의 쟁탈지역으로 백제 영역에서 광개토왕 이후 장수왕대에는 완전히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된 상태였다.
 
6세기 중반 백제 성왕때에 이르러 백제는 신라와 왜의 동맹군으로 한강유역을 완전히 되찾게 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된다 계속 고구려를 멸망시킬때 까지 진격하자는 백제 성왕측과 더 이상의 고구려와의
전면전을 원치 않으면서 또한 백제가 비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던 신라 진흥왕의 입창차이에서 동상이몽의
두국가가 서로 동맹관계를 영원히 지속해 나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실상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에 의해 맺어진 국가간의 동맹은 언제나 항상 깨어지게 되는 법이다.
적국의 적이 바로 나의 아군이 되는 철저하게 자국의 필요와 이익에 따르게 되는 동맹이 영원하라는 법이 없다.
어느쪽에서 누가 깨든 반드시 깨어지는게 오히려 당연한 이치이다.
 
만일에 백제 성왕이 한수지역을 확보하고 평양성을 격파 함락시키고 계속 진격하여 고구려까지 도모한다면
그야말로 거대해진 백제와 상대적으로 빈약한 신라! 게다가 서해를 나갈 수 없는 꽉 막힌 초라한 신라의 지형!
상대적으로 백제는 서해상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다 보면 백제와 신라간의 국력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결국에는 국력차이를 극복 못한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 되거나 백제에게 멸망 당하는 외길 수순이 명백할 뿐!
진흥왕이나 신라조정에서는 바로 이러한 심각한 미래의 문제점을 결코 간과 할 수가 없는 입장인 것이다.

진흥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백제가 현저하게 비대해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평양성 격파후 신라는 더 이상의 백제 진격을 가로 막고 오히려 고구려와 밀약을 맺으면서 고구려가 지배
했던 한수지역의 지배권을 인정 받으면서 챙기고 아울러 백제를 압박하여 스스로 포기한 한주지역을 별다른
전투없이 무혈입성하여 드디어 중국과의 통로를 확보하고 개척하게된다.

또한 552년에 百濟가 漢城과 平壤을 스스로 버린 상황이라면 적어도 진흥왕이 뒷통수를 먼저 쳤다는 일반적
통설은 성립되질 않는다.
.
하지만 누가 뒷통수를 쳤던 서로간 신뢰와 맹세로써 영원한 동맹을 기약하며 맺어진 동맹이 아니라면 전쟁사에서
뒷통수를 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당한 사람이 무능한 것으로 병법서들은 평가하고 있다. 
어차피 전쟁에서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승리가 미덕일뿐, 패배자에게는 어떠한 변명이나 동정심도 보이질 않는다. 
손자병법에서는 "兵者 詭道也 : 전쟁은 속임수"라는 명 구절을 남기고 있다
 
일본서기에 나타난 고간 도도의 성왕 참수 장면에서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오히려 성왕에게
동맹의 맹세를 어겼다고 나온다
신라입장에서는 더 이상 우리가 전쟁을 하기 싫어서 더이상의 고구려 진격을 거절한 것이지 동맹을 깬 것이
아닌데 왜놈들과 내통하여 전쟁을 일으켜서 침공한 자체가 뒷통수를 친 원수가 되고 동맹을 깨는 배신 행위로
간주하여 맹세를 성왕이 어겼으니 왕이라도 참수를 당해야 한다는 논리이고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 성왕의 입장에서는 내친김에 아예 고구려를 결단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도중에 딴지걸고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배신하고 게다가 딸까지 시집보낸 공주를 겨우 小妃 로 만들어 능멸한 것에 대한
분노로써 "생각하면 늘 고통이 골 수에 사무친다"는 상반된 입장이 보여진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이로써 신라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빠르게 유입하고 또는 교류하면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되는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아울러 진흥왕은 신라의 중흥을 이루는데 크게 업적을 남긴 군주로써 선경지명의 군왕으로 평가되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 종전 내용에서 전체적인 맥락은 큰 차이가 없으나 약간의 보충과 더불어 수정되었으며 계속 수정보완
될수도 있습니다.
<본 내용은 2013 년 3월 1일자로 내용이 1차 수정 보완 되었습니다.>